마위전(馬位田) 또는 마분전(馬分田)이라고도 한다. 역마 제도의 연혁에 관해서는 487년(신라 소지왕 9)에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해서 관도(官道)를 수리하다.”라는 기록이 보이기는 하나, 그 신빙성에 관해서는 많은 의문이 따른다.
983년(성종 2)에 지방 공해전을 선정할 때 역전(驛田)을 둘 것을 제정한 것이 아마 그 시초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이 때 설정된 지방 공해전의 규정에는 마전에 관한 구체적 항목은 없다.
고려시대에 마전이라는 토지 종목이 존재했다는 것은 1388년(우왕 14)에 조준(趙浚)의 상소문 내용에 “마위구분전(馬位口分田)은 전례대로 절급하라.”는 대목이 있는 사실로 미루어 확인할 수가 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 호전 제전조(諸田條)에서 마분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대마(大馬) 1필에 대해 7결이며, 긴로(緊路 : 교통량이 많은 역로)에는 1결을 더 첨가한다. 중마(中馬) 1필에 대해 5결 50부, 긴로에는 50부를 더 첨가한다. 소마(小馬) 1필에 대해 4결이며, 긴로에는 50부를 더 첨가한다.”
마분전은 역전의 한 종목으로서 역마를 기르는 입마자(立馬者)에게 지급된 토지로, 역호(驛戶)가 경작하는 ‘자경무세전(自耕無稅田)’이다. ‘자경무세전’이란 유역인(有役人)이 자가 가족노동력으로 경작해서 입역(立役)의 대가로 그 소출의 전부를 취득하되, 국고에 대한 조세 부담은 없는 토지를 말한다.
따라서 마분전은 반드시 역리(驛吏)·역노(驛奴) 등의 역호가 아닌 평민이라도 입마를 하는 조건으로 경작할 수가 있었다.
역에 배치된 역마는 공문서와 진상 물품 등을 전달 수송하고, 내외의 사객(使客)들을 영송하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수송 교통의 수단이었다.
조선 초기 각 역로의 역에 정해진 마필의 수는 상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경국대전≫ 이전 외관직조에 나타난 역의 총수가 540여였으므로, 가령 한 역에 10필 정도의 역마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전국에는 약 6,000필의 역마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역마 1필당 마분전의 지급액은 규정상으로는 매우 넉넉하게 보이나, 실지에 있어서는 역의 감독관원들과 빈번히 내왕하는 사객들의 가렴주구가 심해 이를 견디지 못해서 도망하는 역호가 속출하였다.
이리하여 이른바 ‘역로조폐(驛路凋弊)’의 현상은 날이 갈수록 현저히 나타나서 16세기 이후부터는 그 폐단이 더욱더 심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