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시중 황충준(黃忠俊)의 후손으로, 공조참판 황효성(黃孝誠)의 아버지이다.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조선이 건국된 뒤 전라도판군기감사에 제수되고, 개국공신에 녹훈되었다.
1396년(태조 5)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있으면서 시위갑사(侍衛甲士) 안백(安白)의 아들의 불륜을 문책하였다. 개성유후로 재임 중 1401년(태종 1) 박포(朴苞)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6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거쳐, 1408년 명나라에 천추사(千秋使)로 다녀왔다. 1409년 관직을 남용한 이지성(李之誠)을 탄핵하고, 이듬해에는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서 저화(楮貨)를 관장하였다.
1411년 부인이 죽자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종은 공신의 처임을 들어 쌀 20석과 종이 100권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 해 8월 손흥종(孫興宗)과 함께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을 죽인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서인(庶人)으로 폄출되고 자손들은 금고형(禁錮刑)을 받았다가 1416년(태종 16) 6월에 자손들이 금고형에서 해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