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재(李才). 이명은 이공기(李工錡). 예의판서(禮義判書) 이여(李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문정(李文挺)이고, 아버지는 검교중추부사(檢校中樞府事) 이몽(李蒙)이다. 어머니는 직제학(直提學) 최용갑(崔龍甲)의 딸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1371년(공민왕 20)에 문과 동진사(同進士: 丙科에 해당) 제7위로 급제, 1389년(공양왕 1) 문하부태상시(門下府太常侍)에 이르렀다.
1392년 예조판서를 지내고, 그 해 7월 배극렴(裵克廉)·남은(南誾)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여 이성계(李成桂)의 집으로 찾아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 조선왕조를 개창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공으로 개국공신에 책립되고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에 정도전(鄭道傳) 일파로 지목되어 관작과 공신의 칭호를 삭탈당하고, 지방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죽은 뒤에 부분 복권되어 양후(良厚)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 왕조의 건국에 핵심세력이 된 신진사대부의 한 사람이었으나 권력재편과정에서 축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