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이인임(李仁任) · 임견미(林堅味)의 반대세력으로서 나하추(納哈出)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게을리하였다는 이유로 경복흥(慶復興) · 설사덕(薛師德) · 표덕린(表德麟)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가 왕위에 즉위할 때 배극렴(裵克廉) · 정도전(鄭道傳) · 조준(趙浚) 등과 대비의 선교(宣敎)를 받아 국새(國璽)를 바쳤다. 개국과 더불어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가 되었고, 태조를 보좌하여 왕위에 추대한 공으로 개국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1400년(정종 2) 승녕부(承寧府)가 설치되자 윤(尹)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판사로 승직되었다. 1412년(태종 12) 장성군(長城君)에 봉해졌다. 이보다 앞서 1402년 조사의(趙思義)의 난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았으나 개국공신인 관계로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고신과 공신전을 삭탈당하였다. 시호는 호목(胡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