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강집(姜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여재(姜與載)이고, 아버지는 종성부사 강석창(姜碩昌)이며, 어머니는 신상(申恦)의 딸이다.
1696년(숙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99년에 정언이 되고, 이듬해 지평을 역임하였다. 1700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는데, 정사 이광하(李光夏)가 청나라에서 객사하였는데도 이를 정성껏 치상하지 않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
1705년에 다시 기용되어 사서가 되었으며, 지평 · 정언을 거쳐 양덕현감으로 나갔다. 이듬해, 앞서 1701년의 신사무옥을 다스릴 때, 낭관으로서 동궁모해(東宮謀害)의 넉자를 삭제한 사실이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1711년 소론이 실각하자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