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적이(積而). 증조는 생원 강질(姜礩)로, 할아버지는 창신교위 강응운(姜應運)이고, 아버지는 돈녕부첨정(敦寧府僉正) 강수곤(姜秀崐)이며, 어머니는 정랑 이견(李鋻)의 딸이다.
1606년 사마시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 평안평사(平安評事)를 지내고 공조좌랑 · 예조좌랑 ·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귀(李貴)가 그를 청요직(淸要職)에 두려 하였으나, 외직으로 나가기를 원해 영천군수가 되었다.
이듬해 형조정랑을 지내고 이어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 사도시정(司導寺正)을 역임하였다. 1626년 1년 동안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나 청양(靑陽)에서 살았다.
1627년 명나라 희종(熹宗)이 죽어 이듬해 진향사(進香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통례원(通禮院)의 좌 · 우통례를 지냈다. 1633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법대로만 일을 처리하고 굽히지 않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까지 왕을 호종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동지충추부사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