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의주만호 장열(張烈 : 고려사에는 張侶)이며, 개국공신 장사정(張思靖)의 형이다.
아버지는 본래 안동에서 살았으나 북방으로 이주해 의주의 참리(站吏)가 되었으며, 사어(射御)에 능했다. 그 뒤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쳐 만호가 되어 의주지방의 토호(土豪)로 자리잡았으며, 고려 조정에 복종하지 않고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직을 세습해 만호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에게 무예를 인정받아 위화도에서 함께 회군한 뒤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서훈되고,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를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392년(태조 1) 아우 사정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의흥친군위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同知節制使)를 겸해 이성계의 친병(親兵)을 통솔하였다.
이듬해 황해도의 문화·영녕(永寧)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으며, 1398년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으로 영가군(永嘉君)으로 개봉(改封)된 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판공조사(判工曹事)·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義興三軍府右軍節制使)를 지내고, 이어 화산군(花山君)으로 개봉되었다.
1400년(정종 2) 사헌부로부터 제2차 왕자의 난 때 사정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태종 때 우군총제(右軍摠制)·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등을 지낸 뒤,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에 진봉되어 공직을 물러났다.
용맹이 뛰어나고 병략(兵略)에 익숙했으며, 수염이 배까지 닿았다 한다. 첩기(妾妓)를 아내로 삼아 좋은 평을 얻지 못하였다. 의주토호의 반란이 멈추고, 의주에서 여연(閭延)에 이르는 압록강연안 1,000리를 조선 영토로 편입하는 데 공헌하였다. 시호는 희양(僖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