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화순(和順). 초명은 오사정(吳思正)이며, 호는 수암(守菴)이다. 아버지는 간의대부(諫議大夫) 오순(吳洵)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여 감찰규정 · 헌납(獻納) · 집의(執義)를 역임하고, 창왕 때에는 좌사의대부로서 사전(私田)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이 해 공양왕이 즉위하자, 사인(舍人) 조박(趙璞) 등과 함께 상소하여 우왕과 창왕을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색(李穡) · 조민수(曺敏修) · 이인임(李仁任)이 우왕 · 창왕을 옹립한 것을 탄핵하였다.
이와 같은 과격한 상소로 인하여 한때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다시 복직되어 대사성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 1392년(태조 1)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 일파를 몰아내려 할 때 함께 삭직되어 유배되었으나, 정몽주가 살해되자 풀려나와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 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으로 호조전서가 되고 영성군(寧城君)에 봉해졌다. 1394년 중추원부사에 오르고, 교주강릉도관찰사(交州江陵道觀察使)로 있으면서 정도전(鄭道傳) · 남은(南誾) 등과 가까운 수령 · 군인들이 직책을 소홀히 하거나 차례를 뛰어넘어 승진한 것 등을 엄하게 조사, 처리하였다.
1395년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정당문학(政堂文學) · 경기좌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04년(태종 4)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희(恭僖)이다.
오사충 사후에 “입각도형 입비기공(立閣圖形 立碑紀功)”하라는 태조의 명에 따라 부조묘(不祧廟)의 전사판은 세종 때 경기도 양주에 세워졌다. 이후 전란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소실되어 화순오씨 종중에서는 화순오씨의 부조묘를 모충사(慕忠祠)라 하여 2001년 10월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581-8에 새로 건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