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부유(富有). 전주 출신.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심오인(沈五仁)이며, 태조의 세자인 이방석(李芳碩)의 장인이다.
1380년(우왕 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38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에게 귀의하면서부터 점차 현직(顯職)에 올라, 1391년(공양왕 3)에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성계의 휘하에서 문하사인(門下舍人)이 되었다. 조선 개창 직전인 1392년 6월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3등에 올랐으며, 사헌중승(司憲中丞)이 되었다. 이어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거쳐 중추부사(中樞副使)가 되었다.
1394년(태조 3)에는 대장군(大將軍)과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각각 겸하여 고려 왕의 후손들인 왕화(王和)와 왕거(王琚)를 안동옥(安東獄)에 함께 감금하고, 거제도에서 왕우(王瑀) 부자의 제사를 지내는 등 고려 왕족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조전서(吏曹典書) 재직 중에 딸이 세자 이방석의 빈(嬪)이 되었고, 아내 유씨(柳氏)는 정경옹주(貞慶翁主)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중추원학사가 되었다. 1397년에는 정도전(鄭道傳)·남은(南誾) 등과 함께 군사권을 장악하고, 공료 정책(攻遼政策: 요동정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태조의 서경궁(西京宮) 경영계획을 반대하여 그치게 하였다.
그 뒤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부성군(富城君)에 봉해졌다. 1398년 8월 무인정사(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남은 등과 함께 세자 이방석 파로 지목되어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특히, 정교한 병기 제조에 능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