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해(平海). 고려 때 시중 황유중(黃裕中)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판서 황천록(黃天祿)이다. 본래 출가했다가 우왕 때에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역임하였다.
1381년(우왕 7) 왜구가 명량(鳴梁) 지역에 침입하는 등 전라도가 소란해지자 체복사(體覆使)로 파견되어 민심을 수습하였다. 뒤에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에 임명되어, 1383년 7월 요심(遼瀋)의 적이 단주(端州)에 침입하자 단주상만호 육려(陸麗), 청주천호(靑州千戶) 이두란(李豆蘭) 등과 연합해 해양(海陽) 등지까지 추격해 격퇴하였다.
1388년 요동원정군이 발진하게 되자, 청주상만호로서 예하군사를 이끌고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성계가 회군을 단행해 반정에 성공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승진되었다. 1389년(공양왕 1) 회군공신에 책봉되었다.
1392년 3월에는 이성계가 낙마해 위기에 몰렸을 때 병사들을 이끌고 이성계를 보호하였다. 또한, 그해 정몽주(鄭夢周)가 격살당하자, 사태수습책으로 정몽주 일파를 탄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어 구성로(具成老) 등과 더불어 제군사부(諸軍事府) 군관 200여 명의 연서를 받아, 정몽주 일파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다. 따라서,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의 중요한 명분을 세운 공로를 이루었다.
1392년(태조 1) 10월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8인이 책봉될 때 원종공신이 되었다. 한 달 뒤에 태조의 특지(特旨)에 의해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서 의흥친군위도진무(義興親軍衛都鎭撫)를 겸하였다.
1394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죽었다. 질병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태조는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죽은 뒤에는 특별히 이화(李和)를 보내어 예장과 부의를 후하게 하였다. 문하시랑찬성사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