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렴은 조선전기 개국1등공신에 책록된 공신이자 문신이다. 1325년(충숙왕 12)에 태어나 1392년(태조 1)에 사망했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밀직부사에까지 승진했다. 1388년 이성계의 휘하에서 위화도회군을 도왔으며, 이어 3군도총제부의 중군총제사가 되어 도총제사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했다. 1392년 문하우시중으로 조준·정도전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공으로 문하좌시중이 되어 두 왕조에 걸쳐 정승에 올랐으나 그 해 세상을 떠났다.
고려 말 진주 · 상주의 목사(牧使)와 계림윤(鷄林尹) · 화령윤(和寧尹) 등 외직을 담당할 때 선정을 베풀었다.
1376년(우왕 2)에는 진주도원수(晉州都元帥)로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이듬해에는 우인열(禹仁烈)을 대신해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이 때 병영이 있는 창원 인근의 합포(合浦)에 왜구 방어를 위한 축성을 주관, 완성했는데 조선시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의 번성(藩城)이 그것이다.
한편 1378년 경상도원수로서 욕지도(欲知島)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겨울에는 경상도도순문사로서 하동과 진주에 침략한 왜구를 추격, 사주(泗州)에서 크게 이겼다.
이듬해에는 진주 반성현의 대혈전(大血戰), 울주전투와 청도전투 · 사주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 뒤, 정치적 성장을 거듭, 1380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우군도통수(右軍都統師)인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참여,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1389년(창왕 1) 7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의 요직을 맡았다. 그 해 10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고,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0년(공양왕 2)에는 평리(評理)로서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며, 같은 해에 양광도찰리사(楊廣道察理使)가 되어 한양 궁궐의 조성을 감수하였다. 이어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가 되어 도총제사(都摠制使) 이성계의 병권 장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개경의 내성(內城)을 축성하는 총책을 맡고, 1392년에는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해 7월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조준(趙浚) ·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에 중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이어 1등 개국공신이 되고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이 되었다. 1392년 11월 세상을 떠났으며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정승에 올랐다.
그러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이 세자에 책봉되는 데 관여했다는 이유로 뒤에 태종에 의해 폄하(貶下)되었다. 아들이 없어 누이의 외손인 안순(安純)이 주상(主喪)이 되었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