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군공신 ()

고려시대사
개념
1388년 5월에 단행된 위화도회군의 주도자들에게 준 칭호를 가리키는 관직용어. 무진회군공신 · 태조조회군공신.
이칭
이칭
무진회군공신, 태조조회군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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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388년 5월에 단행된 위화도회군의 주도자들에게 준 칭호를 가리키는 관직용어. 무진회군공신 · 태조조회군공신.
개설

1390년(공양왕 2) 1차 책봉되었고, 조선 개국 후 다시 책봉되었다. 전자를 무진회군공신(戊辰回軍功臣)이라 하고, 후자를 태조조회군공신(太祖朝回軍功臣)이라 한다.

내용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권 장악을 위해 끊임없는 정치적 음모를 꾸미고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해갔다. 이성계 일파에게 있어 주도권을 강화하기 위한 급선무는 무엇보다도 위화도회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나아가서는 이성계 일파의 동조세력에 대한 정치적 위치를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의 하나가 회군공신의 책봉이었다.

1390년 4월에 교서를 내려 회군에 직접 참여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와 그의 휘하에 있었던 의주천호(義州千戶) 장철(張哲) 등 45인, 이미 죽은 변안열(邊安烈)·조인벽(趙仁璧)·이원계(李元桂)·박총(朴叢)·안경(安慶)·김상(金賞)·김백흥(金伯興) 등 7인, 그리고 최영(崔瑩) 병력과의 대치상황에서 이성계 일파에 가담해 계책을 낸 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를 포함한 54인을 포상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 때 공신포상의 명분은 “무진년(戊辰年)에 최영 등이 요양(遼陽)을 범하고자 하여 장차 나라가 천조(天朝: 명나라)에 화를 입어 사직의 존망이 경각에 달렸을 때, 이성계와 조민수(曺敏修)가 대의를 수창하고 제장이 의논해 회군을 결정함으로써 사직을 안정시킨 공로를 포상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선정된 인물에 대해 물의가 빚어졌다.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의 정권장악을 위한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성계 일파와 대립해 숙청된 인물로 동도회군(同道回軍)한 고위 무장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요동원정군(遼東遠征軍) 편제에서 서열 1위였던 좌군도통사 조민수, 3위인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4위인 안도도원수 정지(鄭地), 그리고 양광도원수 왕안덕(王安德), 안주상원수 지용기(池湧奇), 조전원수(助戰元帥) 최공철(崔公哲), 특히 최영의 휘하에서 이성계와 쌍벽을 이루었던 영삼사사(領三司事) 변안열과 그 당류인 한양윤(漢陽尹)김백흥 등의 숙청이 잇달았다. 이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성계 일파 뿐만 아니라 반이성계파의 인물까지 공신으로 책봉했던 이유는 위화도회군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고 앞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초석을 마련하려는 이성계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화도회군의 명분을 강조하는 정치적 목적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반역의 단죄 대상을 공신으로 포상할 수는 없었다. 공신 대상에서 탈락된 6인을 논공교서에서 가려보면, 전시중(前侍中) 조민수, 전판삼사사(前判三司事) 왕안덕, 고(故) 영삼사사 변안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지용기, 고 한양윤 김백흥, 전충주절제사(前忠州節制使) 최공철 등이 해당한다.

결국 1391년 2월에 공신전(功臣田)은 1등공신 이성계에게 전(田) 100결(結), 2등공신 심덕부 등 17인에게 50결, 3등공신 최단(崔鄲) 등 30인에게 30결, 도합 48인을 확정하였다.

6개월 후인 그 해 8월에는 공신녹권(功臣錄券)이 지급되었는데, 그 사이에 이·초(彛初)의 옥사(獄事)에 연루된 혐의로 경보(慶補)·정지·심덕부·박위(朴葳)·윤사덕(尹師德)·이빈(李彬) 등이 치죄(治罪)당하였다. 그러나 이들 6인은 그 뒤 유죄(宥罪) 또는 재등용되었다.

이 48인을 정리하면 〈표〉와 같다. 이들이 회군공신으로 선정된 사유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출정한 무장들이 가장 많으며, 둘째, 원정군에 참여했거나 이에 가담한 동북면(東北面)의 군사들이다. 셋째, 서북면 전선에 주둔하고 있다가 회군 시에 동조, 편승한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지역담당 군직을 지닌 경우로 의주만호 장사길, 의주목사 정송, 의주만호 백영우, 의주천호 장철 등이 있다. 넷째, 회군세력과 최영의 정부군이 대치한 상황에서 동조, 가담한 관료군으로 조인벽·박총·유광우·이백·이덕림·윤소종·남재 등이 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이성계 일파에 적극 동조한 것은 아니다. 대세에 밀려 외면적으로 타협하다가 거세되거나 은둔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왕빈·김천장·이백·정송·이덕림·백영우 등이 이에 해당하는 인물로 짐작된다.

무진회군공신의 대다수는 조선 개국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이들은 이성계의 인척이거나 혼인 등을 통해 족벌로 성장하게 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위화도회군은 이성계의 집권을 정당화하는 명분의 하나로 강조되어 왔다.

1393년(태조 2) 명나라와의 외교적 갈등이 고조되어 전쟁 직전까지 이르렀을 때 회군공신은 재책봉되었다. 이는 태조조회군공신(太祖朝回軍功臣)으로 불리어, 전조(前朝)의 무진회군공신과 구분되고 있다.

태조조회군공신의 책봉은 다분히 대명관계(對明關係)를 의식한 정책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등차별 포상규정이 없이 3등급으로 회군공신을 책봉한 것도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이 후 공신전의 지급에 미온적이었던 점에서도 그러하다.

다만 책정 인원수의 경우 태조조회군공신은 전조에 있어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 6인을 포함해 1등 16인, 2등 24인, 3등 15인 등 총 55인을 책봉했으며, 추록된 왕강(王康)까지 포함하면 총 56명이다.

무진회군공신의 명단에 없는 6인은 회군 1등공신 최영지(崔永池), 3등공신 남성리(南成理)·이지(李至)·장자충(張子忠)·최윤수(崔允壽)·황순상(黃順常) 등이다. 다만 최영지의 경우 최윤지(崔允池)의 개명으로 여겨진다.

그런데『태조실록』에 기재된 태조조회군공신은 33인으로만 되어 있어서 다시 책봉된 회군공신의 정확한 명단을 알 수 없다. 1390년의 논공교서에 등재된 인물 중 이성계 및 이덕림·박총·김백흥 등이 태조조회군공신에서는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 건국에 대한 공훈의 유무에 따라 위차조정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의의와 평가

무진회군공신 책봉이 이성계 일파가 창왕과 최영세력을 거세하고 고려말의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펼쳤던 정치적 준비작업이었다면, 태조조회군공신의 책봉은 대명관계의 호전(好轉)을 의도하면서도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공훈을 세훈 인물들에 대한 논공행상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조선 초 공신 책봉과 개국·정사·좌명공신의 정치적 동향」(김윤주,『한국사학보』35, 2009)
「고려말 신흥유신의 성장과 조선 건국」(이익주,『역사와 현실』29, 1998)
「무진회군공신의 책봉전말과 그 성격」(박천식,『전북사학』3,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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