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의 집에 행차하였을 때, 신돈의 사비(私婢)로 왕을 모신 뒤 우왕을 낳았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신돈의 첩이며, 우왕은 공민왕의 소생이 아니라 신돈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공양왕(恭讓王) 옹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성계(李成桂) 세력의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1371년(공민왕 20) 공민왕은 신돈을 수원에 유배시킨 후, 왕우(王禑)를 궁중에 들이고 강화부원대군(江華府院大君)에 봉하였으며, 죽은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이라 하였다.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반야는 밤중에 태후궁(太后宮)에 들어와 우왕이 자기의 아들이라 호소하다가 순위부(巡衛府)에 하옥되고, 이어 임진강에 던져져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