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객사란 각 군현이나 역참에 설치하여 사신들의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 : 맞아들이고 보냄)이나 숙박 등의 제반 편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통 ‘관(館)’으로 통칭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역(驛) 또는 참(站)을 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여기서는 군현의 객사를 지칭한다. 용만관의 명칭과 유래는 고려시대에 의주를 용만현(龍灣縣)이라고 한 데에서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압록강을 용만이라 불렀던 데에서 기인한 것 같다.
이 용만관은 1484년(성종 15)에 목사 이강정(李康正)이 창건하였으며, 1718년(숙종 44)에 중문과 대문을 세웠다. 또, 1843년(헌종 9)에 윤치정(尹致定)이 상칙방(上勅房)과 동대청(東大廳)을 건립하였다.
용만관이 대중국 사행로의 중요한 경유지인 의주에 설치된 것은 그만큼 의주가 사신왕래상 주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당시에 임금이 의주로 피난하게 되자 용만관은 임시로 국사를 처리하는 곳이 되었으며, 명나라 장수나 사신의 영접은 주로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그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의 개시무역(開市貿易)이 성행하게 되자, 용만관의 중요성은 더욱 증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용만관은 사신의 숙소로서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무역에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