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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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부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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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사객(使客)의 왕래에 따른 물자의 운송이나 세폐 · 진상물의 운반 및 지방관의 교체에 따른 영송 · 접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
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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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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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객(使客)의 왕래에 따른 물자의 운송이나 세폐 · 진상물의 운반 및 지방관의 교체에 따른 영송 · 접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
내용

쇄마법(刷馬法)이라고도 한다.

이 법은 사객이나 지방관의 행차에 필요한 말을 구입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때문에 일찍이 ≪경국대전≫에 관리의 등급에 따른 급마 규정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역마제도의 변화와 함께 신역(身役)이 입역제(立役制)에서 고립제(雇立制)로 발전함에 따라 급마제도는 쇄마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 전기 역참(驛站)에서는 마호(馬戶)의 입역 형태로써 역마를 마련하였다. 각 지방 군현의 경우는 분양마 등 관마(官馬)를 이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인조 대를 거치면서 점차 민간인의 말을 돈으로 사서 이용하는 쇄마고립제(刷馬雇立制)가 시행되었고 이로써 고마법이 성립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의 세폐·진상의 운송 및 감사·수령·군관 등 지방관의 잦은 교체와 영송 등으로, 종전의 급마 체계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의주에서 한양에 이르는 평안도·황해도의 서로(西路) 지방에서부터 시작,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615년(광해군 7) 병조가 선혜청에게 각 지방의 차사원(差使員)을 파견할 때 역마를 고립하도록 조처한 것을 비롯, 1639년(인조 17) 병조목(兵曹木 : 병조재정의 일부) 1,000필을 경기도 각 역에 나누어주고, 중국 사신의 내왕에 따른 말(入把馬)을 고립한 데서부터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681년(숙종 7)에는 쇄마고립제가 정착되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중국에의 세폐나 방물(方物)·진상, 기타 잡쇄마는 선혜청에서 공가(貢價)를 지급 받은 쇄마계(刷馬契)라는 공인이 담당하였다. 한편 지방관의 영송에 필요한 쇄마 규정도 법제화되었는데, ≪속대전≫에 이러한 쇄마 규정이 잘 나타나 있다.

즉, 길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삼남(三南)·해서·관동의 경우 대체로 15∼20필이 기본이었다. 영남·호남의 경우에는 큰 읍에서 아주 작은 읍까지 2∼7필까지 각각 추가되었다. 또한, 영남·호남의 수령이 공무로 상경할 때는 거리에 따라 필(疋)수가 각각 달랐다.

거리는 대체로 정(程 : 1程은 90里)을 단위로 하였다. 즉, 호서·관동의 경우 5일정 이상은 4필, 4일정 이하는 3필을 지급하였다. 각 도에서 도내를 내왕할 때는 3필을 기본으로 하였다.

인부나 쇄마 비용의 지급 규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쇄마가(夫刷馬價 : 人夫와 刷馬價의 합칭)는 모두 저치미(儲置米 : 대동미 가운데서 지방재정에 쓰도록 留置한 쌀)를 쓰도록 규정하였다. 즉, 진상품 운반과 공무로 내왕하는 데 타는 말 값은 거리를 계산해 지급하였다.

30리를 1식(息)이라 하여, 경기·호서는 복마 1필에 쌀 2말, 기마 1필에 쌀 1말 5되를 지급하였다. 짐꾼[負持軍] 1인에 쌀 1말씩, 영남·호남의 경우는 복마 1필에 2말 5되, 기마 1필에 2말, 짐꾼은 1말 2되 5홉을 지급하였다. 해서는 기·복마 값이 같고, 호남·영남의 짐꾼의 삯은 같으며, 경기·호서·관동은 날수로 계산하여 3식(三息)을 1일정(一日程)으로 하였다.

한편, 진상은 본도나 타도를 막론하고 각 읍에서 교대로 운반하였다. 외관의 영송에 따른 쇄마는 일정을 계산해 지급하고,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의 양료(糧料)도 함께 지급하였다.

또한, 지방관의 교체에 따른 쇄마 지급도 지역에 따라 달랐다. 경기는 과체(瓜遞 : 임기 만료 교체)·경체(經遞 : 임기전 교체)를 막론하고 새로운 관리에게 쇄마를 지급하였다. 구관(舊官)은 민결(民結)을 징수해 지급하였다.

삼남(三南)은 과체자의 경우 신관과 구관 모두 쇄마를 지급하였다. 다만, 경체자의 경우 호서에서는 신관과 구관 쇄마가를 모두 민결에서 거두고, 영남은 신관은 절반을, 구관은 모두 민결에서 징수하였다.

수령이 휴가를 받아 사사로이 출행할 경우 마필은 지급하지 않았다. 다만 해서·관동 지방은 공문에 준해서 지급하였다. 흉년을 만나면 진상하는 것을 제외하고 8분의 2를 감분(減分)하였다.

이와 같이, 고마법은 쇄마 및 쇄마가 지급 규정을 마련하여 운영되었다. 쇄마가는 원칙적으로 병조나 호조, 또는 선혜청 등의 국고나 지방의 저치미로 충당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점차 민결에서 고마조(雇馬租)·고마전(雇馬錢) 등을 징수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때문에 고마고(雇馬庫) 또는 고마청(雇馬廳)이라는 창고를 운영하여 충당하였다.

한편, 평안도 지방에서는 의주의 경우 중국 사신의 내왕에 따른 휴대품을 운반하기 위하여 겸제마제도(兼濟馬制度)를 실시하였다. 겸제마란 각 역참에 별장(別將)이나 전향군관(轉餉軍官)을 두어 사신들의 짐을 운반하던 제도인데, 고마법과 함께 민고(民庫)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마고·고마청은 민고의 폐단으로 그 폐지를 논의하는 자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 19세기 농촌 사회에 광범위하게 설치되어 규정 외의 남수(濫收)로 농민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고마청

참고문헌

『정조실록』
『비변사등록』
『목민심서』
『경세유표』
『만기요람(萬機要覽)』
「조선후기 고립제발달」(강만길, 『한국사연구』 13, 한국사연구회, 1976)
「민고제의 이정과 민고전」(김용섭, 『한국근대농업사연구』 상, 일조각, 1984)
「조선후기역지분석(朝鮮後期驛誌分析) Ⅰ」(조병로, 『동국사학』 15, 1984)
「조선시대 역제연구」(조병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조선후기 교통발달에 관한 연구-교통수단으로 역마확보를 중심으로-」(조병로, 『국사관논총』 57,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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