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세량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예문관검열, 석성현감,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보(德輔)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7년(연산군 3)
사망 연도
1547년(명종 2)
본관
여흥(驪興)
주요 관직
예문관검열|석성현감|동부승지
정의
조선 전기에, 예문관검열, 석성현감,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덕보(德輔). 민건(閔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예달(閔禮達)이고, 아버지는 민구(閔球)이며, 어머니는 신영보(申永保)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5년(중종 20) 진사로서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7년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어 군기의 재확립을 강조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승지 이구령(李龜齡)·이현보(李賢輔) 등이 전강(殿講)의 내용을 누설한 일로 대간(臺諫)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검열로서 이들과 내통한 일이 있는가에 대한 추고를 당하였다.

1530년 주서(注書)로 있을 때 유례없는 흉년인데도 승지들이 기녀와 악공(樂工)을 모아 성악(聲樂)을 즐겼다는 이유로 대간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자, 민세량도 함께 했다는 이유로 추고를 당하였다. 그러나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532년 가인의(假引儀)가 되었으며 이어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냈다.

1534년 우의정 김안로(金安老)가 득세할 때 수찬으로서 김안로의 득세를 비꼬다가 죄를 얻어 곽산으로 유배당하였다. 그 뒤 곧 풀려나 다시 석성현감이 되었다가 또 다시 파직되어 직첩을 빼앗겼으나, 1538년 직첩을 환급받았다. 1542년 경상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시강관(侍講官)이 되어서는 수원·해남 등 지명의 강복(降復)에 대하여 강(講)하였다. 즉, 그 지방에 큰 변란이 일어난 시기의 멀고 가까움에 기준을 두지 말고 회복시키려면 모든 대상 지역을 회복시키고, 깎아내리려면 모든 대상 지역을 깎아내릴 것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다시 동부승지를 역임했으며, 1546년(명종 1)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7년(명종 2)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집필자
조병로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