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졸(驛卒)이라고도 한다. 역노비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문헌기록상 고려시대부터 나타나고 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운노비(轉運奴婢)와 급주노비(急走奴婢)로 나뉘어졌다. 전운노비는 역에서 사신의 복물(卜物:말에 실어 나르는 짐)이나 진상(進上)·공부(貢賦) 등의 관수품을 운반했고, 급주노비는 중국 송대의 체포제도(遞鋪制度)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체포제도는 우역(郵驛)의 하나로서 체송 방법에 따라 보체(步遞 : 사람의 다리 힘을 이용한 전달문서)·마체(馬遞:말 등이나 마차 등을 이용한 문서전달)·급각체(急脚遞 : 급히 전달해야 되는 공문서를 말이나 사람이 빨리 전달하던 제도) 등으로 조직되었다. 이중에서 급각체가 급주노비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들은 각력(脚力 : 다리 힘)을 이용해 문서를 전송하는 일을 담당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구분전(口分田)을 받았다. 조선 초기 역노비는 사찰의 노비[革去社寺奴婢]와 신왕조 창건에 반대한 문무관료들의 사노비로써 충당되었다. 그 뒤 역노비의 신역(身役)은 대대로 세습되었다.
이들은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아래 부모 중 한쪽이라도 노비인 경우에는 자녀도 노비로 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역노비 당사자가 죽으면 자식이 그 신역을 계속했고, 만약 자식이 없는 경우에는 다른 노비로써 충원하였다.
그러므로 한 번 역노비에 충원되면 신역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나 역노비의 신분은 사회변동에 따라 변동되었는데, 이 때 나타난 현상이 역노이승법(驛奴吏陞法)의 실시이다. 이것은 역노와 양처(良妻 : 양인신분의 처) 사이에 낳은 소생을 역리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원래 노비와 양처(良妻) 사이의 소생은 노비세습제에 의해 당연히 천인이 되어야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뒤로는 양민 인구의 감소로 국방과 재정에 큰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군공·납속에 의한 면천제가 실시되고, 노비세습제도 변해 노비종량화의 길도 점차 열렸던 것이다. 또한 허속(許贖 : 재물을 헌납하고 신분변동을 허락함)·모칭양인(冒稱良人)·헐역(歇役 : 부담이 가벼운 역)에의 투속(投屬), 유망(流亡)과 피역화(避役化 : 자신에게 지어지는 의무를 피함)의 추세 등에 따라 신분의 변동이 발생하였다.
역노비의 신역은 선상입역(選上立役 : 역에서 노역을 수행)과 신공납부(身貢納付)의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입역은 노역(勞役)을 제공해 입마나 태운, 그리고 잡역 및 군역에 종사했으며, 납공은 입역 대신에 일정한 신공전(身貢錢)을 납부하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선상입역체계였으나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 이후에는 재정상의 이유로 입역과 납공체계가 병행 실시되었다.
그리하여 신공전이 역의 재정에 커다란 세원이 되었으며, 주로 역마구입비에 충당되었다. 역노비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사육해 입대(立待)시키거나 말 값을 내는 입마역(立馬役)이었다. 특히 평안도와 서울, 그리고 동래를 연결하는 역로에서는 잦은 사신왕래로 인한 영송비의 부담, 마가(馬價)의 앙등으로 폐단이 심하였다. 이러한 고역(苦役)과 신분상의 불리함은 많은 개선책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나타났다.
역노비는 지역에 따라 함경도와 같은 경우 이졸작대법(吏卒作隊法 : 역리와 역노비가 군대의 대오를 이루는 제도)에 따라 군역에 종사하였다. 이졸작대법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이후 적극 장려되어, 역노비는 수령의 하수친병(下手親兵)으로 봄·가을에 조련되었다.
역노비의 군역입속(軍役入屬)은 양역 인구의 부족을 해소하고 유사시 수령의 친병으로서 역할이 컸지만, 양역(兩役 : 군역과 수령의 친병이라는 이중의 역)에 따른 고역으로 도망과 피역(避役)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