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

경부고속도로 신갈 분기점
경부고속도로 신갈 분기점
교통
개념
사람과 재화의 공간적 이동을 돕는 교통시설물. 길.
이칭
이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도로는 사람과 재화의 공간적 이동을 돕는 교통시설물이다. 「도로법」에서는 일반의 교통에 공용되는 도로로 구체적으로는 고속도로, 일반국도, 특별시도, 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로를 지칭한다. 역사적으로는 왕명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왕래인에게 역마와 숙박을 제공하며, 공공물자를 운송하는 등 국가통치조직의 교통수단으로서 기능했다. 도로는 인류문명 발전의 기초이며 물자의 운송로, 지식과 기술 등의 전파로, 군사 이동로로서 정보교환과 재화 유통을 촉진하는 수단이었다. 2009년 12월 기준 우리나라 도로 총연장은 104,983㎞, 도로 포장률 79.2%이다.

정의
사람과 재화의 공간적 이동을 돕는 교통시설물. 길.
개설

도로는 인류문명 발전의 기초이며 물자의 운송로, 지식과 문화 및 기술 등의 전파로, 군사 이동로로서 인간집단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재화의 유통을 촉진시키는 수단이었다.

사전적 의미로는 ‘차나 우마 및 사람 등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만들어진 거의 일정한 너비로 뻗은 땅위의 선’이다. 고고학적 측면에서 도로는 ‘대상(帶狀)으로 연속성이 있는 특정공간을 형성하고 그 공간에는 노면으로 인정되는 경화면(硬化面)과 측구(側溝) 등의 관련시설과 통행로로 이용된 흔적이 있어야 하는 구조’를 말한다.

우리나라의 「도로법」에서는 ‘일반의 교통에 공용되는 도로’로서 구체적으로는 고속도로, 일반국도, 특별시도, 광역시도, 지방도, 시도, 군도, 구도를 지칭한다. 이외에 ‘ 터널, 교량, 도선장(渡船場) 등 도로와 일체가 되어 도로의 효용을 다하게 하는 시설이나 그 공작물까지를 포함한다’고 규정하였다.

이와 같은 도로의 어원은 중국의 『주례(周禮)』 주기에 따르면 경(徑)은 우마를 수용할 수 있는 오솔길이고, 진(畛)은 수레[大車]가 다닐 수 있는 소로(小路)이며, 도(途)는 승거(乘車) 한 대가, 도(道)는 승거 두 대, 로(路)는 승거 세 대를 수용할 수 있는 길이라 하여 도와 로는 원래 길의 등급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도와 로의 명확한 구분이 없이 길의 중요도에 따라 대로, 중로, 소로의 구분이 있을 뿐 도로와 길이 같은 개념으로 통용되고 있다.

한편, 서양에서는 ‘이동’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Vahana’와 라틴어의 ‘Vehiculum’에서 유래되었으며, 영어의 ‘road’는 라틴어의 ‘rad(말타고 여행하다)’에서, ‘path’는 ‘pad(발로 다져진 길)’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도로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야생동물의 통로설과 원시인의 이동로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야생동물 통로설은 들소와 같은 야생동물은 본능적으로 정기적 이동을 하게 되는데 북아메리카의 플레인즈 인디안(Plains Indian)같은 부족들이 들소떼를 사냥하여 고기와 가죽을 생활용품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들소들의 계절적 왕래에 따라 인디언 통로(Indian Trails)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통로들이 서부개척민의 이동로가 되어 후일 미국의 대륙황단철도의 모체가 되었다는 견해이다. 원시인 이동로설은 신석기인들이 소규모 집단을 구성하여 여름과 겨울을 번갈아 이동함으로써 점차 정착생활을 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우리나라의 도로는 일정한 조직적 권력체제나 기술에 의하여 체계적인 시설물을 설치하여 왕명이나 공문서를 전달하고, 왕래인에게 역마와 숙박을 제공하며, 공공물자를 운송하는 등의 국가통치조직의 교통수단으로서 기능해 왔다.

삼국시대의 도로

우리나라 선사 시대 및 부족국가 시대의 도로 실태는 기록상의 한계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고조선 시대에는 일찍이 수도인 왕검성과 요서지방의 대 · 소릉하와 고죽국(孤竹國)을 지나 연(燕)과 제(齊)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육상교통로가 발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연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의 출토, 청동제 차여구(車輿具) 및 석노(石砮)의 출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여 시대에는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의하면 기원전 8∼7세기경 부여와 주(周) 및 한(漢)에 이르기까지 중원과의 교섭이 활발한 것으로 보아 교통로가 개척되었으며, 북의 약수(弱水), 남의 고구려, 동의 읍루(挹婁), 서의 선비(鮮卑)와의 교류나, 제가(諸加)들이 사출도(四出道)를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과 지방 읍락간의 일정한 교통로가 개척되어 일정한 도로가 개설되었을 것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환인졸본성에서 도읍한 이후 환도산성국내성 양 지역 간의 교통로가 발달되었다. 이후 대외 정복 전쟁을 통해 부여 · 북옥저 · 동옥저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나부(那部) 중심의 행정조직을 갖추면서 교통로를 확보해 나갔다. 이는 각저총무용총의 수레 그림과 오회분 5호묘의 수레신 · 마굿간을 통해서도 당시에 개척된 도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국내성과 요동지역 사이에는 북도(北道; 혼하 상류-유하-휘발하-혼강-위사하)와 남도(南道;혼하-소자하-부이강-혼강-신개하)의 2개 교통로가 개척되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남도는 현도군을 축출하면서 확보한 지역으로 국내성과 요동 사이의 교통로였으며 북도는 고구려와 부여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였다.

427년(장수왕 15) 평양성 천도 이후에는 백제 · 신라와의 전쟁을 거치며 평양성 중심의 교통로를 확대하였다. 그 결과 남한강은 물론 소백산맥 지역의 충주-죽령 지역까지 진출하여 북남 교통로의 확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수도인 평양에 장안성(長安城)을 축조하였는데, 여기에서 발굴된 자갈로 축조된 도로 및 수레바퀴 흔적, 대교(大橋)의 건설 기록 등을 통해 볼 때 상당한 규모의 도로가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장안성의 경우 방리제(坊里制) 또는 부방제(部坊制)에 의거하여 정방향 또는 장방향의 도성체제하에 대로 · 중로 · 소로가 축조되었다.

나성 내의 도시유적에서는 약 20㎝ 두께의 강자갈이 깔린 12.6∼12.8m 넓이의 도로유구와 약 60∼70cm 폭의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또한 국내성에서 평양성 사이에 17개 역(驛)이 있었다고 한 것은 도로를 이용한 국가행정명령 전달체계가 발달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 시대의 도로는 중앙 및 지방 통치조직의 확립에 따라 발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漢城) 시기에는 낙랑(樂浪)말갈(靺鞨) 및 고구려와의 전투를 위해 북방교통로인 자비령로 · 방원령로 · 재령로가 개척되었으며, 웅진 시대에는 수도의 5부-5항(巷)제 및 지방의 방(方)-군(郡)-성(城)체제로의 개편 과정에서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이 당시 도로의 모습은 풍납토성(風納土城), 왕궁리, 궁남지(宮南池), 쌍북리, 관북리 유적 등에서 보인다. 풍납토성에서는 남북을 관통하는 너비 8m 정도의 도로와 교차하는 너비 5m의 동-서 방향 도로가 발굴되었는데, 노면의 기반층을 굴착하여 다진 후 잔자갈을 4.5∼5m, 두께 20cm 정도 깔고 그 위에 고운 흙과 모래를 덮고 양쪽 배수로 시설을 갖춘 구조였다.

궁남지 도로 유적은 동-서 방향의 노면너비 10m 내외이고 노면에 특별한 포장시설은 보이지 않으나 다수의 중복된 수레바퀴자국이 확인되었다. 관북리 유적의 경우 남-북대로의 노면너비 8.9m, 측구 배수시설을 포함하면 10.75m 규모이며, 동-서 소로는 너비 3.9m이다. 이와 같이 백제의 도로에 나타난 특징을 보면 노면을 포장하지 않고 도로 양측에 측구시설인 배수로나 암거시설이 설치된 점이다.

신라 시대의 도로 역시 소국의 병합과 정복활동의 과정에서 정비되었다. 일찍이 아달라왕 3년(156)에 계립령(雞立嶺), 5년(158)에 죽령을 개척하였으며 소지왕 9년(487)에 이르러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관도(官道)를 수리한 것은 도로교통의 필요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한편, 법흥왕 · 진흥왕대 이후 정복활동 지역의 통치를 강화하고자 진평왕 · 문무왕대에는 교통기구를 정비하였는데, 내정기구로서 고역전(尻驛典) · 공봉승사(供奉乘師)에 이어 어룡성(御龍省)을 설치하였다. 또한 진평왕 · 문무왕대에는 중앙의 경도역(京都驛)에 이어 승부(乘府) · 선부(船府)를 설치하여 육상 및 수상 교통업무를 관장하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도로교통 정책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신라의 도로 유적은 왕경(王京)도로와 지방도로로 나뉜다. 먼저 왕경도로는 대표적으로 황룡사지(皇龍寺址) 주변도로와 분황사(芬皇寺) 남쪽 동서도로, 전랑지 서쪽 남북도로, 황남동 북쪽 동서도로, 월성(月城) 석교 남쪽 남북도로, 황성동 동쪽 남북도로, 남산왕정곡 남북도로, 서부동 남북도로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왕경도로의 발굴 결과의 특징을 종합해보면, 첫째, 도로의 평면형태가 방형의 격자모양으로 구획되고 남-북, 동-서 방향의 직선 도로인 점, 둘째, 노면 폭은 대략 너비 5m, 소로 10m, 중로 15m의 대로로 축조되었으며, 셋째, 노면구조는 직경 5∼10cm 내외의 잔자갈과 황색 사질토, 황갈색 점질토와 황갈색 사질점토를 섞어 구축하고 상 · 하층이 다른 노면구축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배수시설인 측구(側溝)와 암거(暗渠)시설이 있으며, 넷째, 도로의 축조시기는 황룡사 주변 도로유구를 통해 판단하면 7세기대로 추정된다.

지방도로는 확대된 통치 영역을 관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가야를 멸망시켜 울산-부산-김해-진주로 통하는 길(東海通)과 창녕-합천-거창으로 나아가는 길, 한강유역 점령 이후 조령-충주-이천-용인-수원-남양으로 통하는 길(北海通)과 경주-영덕-울진-삼척-강릉을 거쳐 속초-고성-함흥에 이르는 길(北海通)이 열리게 됨으로써 이른바 5통(通)-5문역(門驛)이 연결되는 교통로가 개발되었던 것이다.

또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해 경주-양산-창녕-거창-남원-무주-나주에 이르는 길(海南通)과 고구려 평양성과의 교통로인 경주-안동-죽령-원주-포천-수안-평양에 이르는 길(鹽池通)이 개척됨으로써 군사 · 외교 및 물자운송 등에 필요한 도로가 병행하여 개발되었다. 이와 같은 5통-5문역은 삼국통일 이후 지방통치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9주 5소경을 연결하는 교통로로 확대되어 왕경과 지방을 서로 잇는 도로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지방도로 유적으로는 대구 봉무동(鳳舞洞) 유적, 대구 동촌(東村) 유원지 유적, 경산 대평동(大坪洞) 유적, 울산 굴화리 및 매곡동 신기 유적, 밀양 가인리(佳仁里) 유적, 김해 율하 관동리(栗下 官洞里) 유적 등이 있다.

이들 지방도로 유적에 대한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첫째, 축조유형에 따라 돌을 깔거나 사질토 등을 섞어 노면을 축조한 구축된 도로와 노면이 축조되지 않았으나 사용 이후 보수되어 구축된 도로, 정지면 구축 시 구상(溝狀)형태의 수혈(竪穴)에 의해 노면이 설치된 도로로 나뉘며 수레바퀴 흔적이 나타난다.

둘째, 도로의 평면형태는 ‘一’형이 대부분이나 ‘十’, ‘Y’자형으로 단일노선이 많다. 노면의 규모나 형태는 소로 3m 내외, 중로 5m 내외, 대로 8m 내외이며 기반층을 굴착하거나 정지하여 10∼30㎝ 내외의 천석이나 할석 · 역석 그리고 사질토 등을 깔았으며 노면 양쪽에 측구(側溝)와 같은 배수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셋째, 축조 시기는 관도가 정비되는 삼국시대로 추정되나 특히 통일 이후 왕경과 지방 간의 통치체제가 확립된 때부터로 추정된다. 넷째, 도로의 기능면에서 사람과 생산물자의 이동을 위한 운송교통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정치 · 행정 및 군사도로로서의 기능도 수행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외에 수레 유물이 다수 출토되어 도로교통상 물자의 운송에 사용되었을 개연성을 높여주고 있다. 기록에서도 유례왕 원년(23)에 수레[車乘]를 제작했고 눌지왕 2년(438)에 백성들에게 우거(牛車)를 이용하는 법을 가르쳤다다고 하는 등 수레를 이용하여 조세운송이나 군수물자 등 화물운송에 널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시대 교량의 가설도 도로 교통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말해주는 시설물이다. 그것은 413년 고구려 평양성 평양주(平壤州)의 대교(大橋) 가설, 498년 백제 웅진성의 웅진교(熊津橋)의 가설, 부여 능산리 절터의 567년경 목교(木橋) 흔적, 그리고 신라 760년(경덕왕 19) 2월 문천(蚊川) 위에 월정교(月精橋) · 춘양교(春陽橋)의 축조가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고려시대의 도로

개경의 도성도로

고려는 후삼국 통일 이후 개경에 도성을 조성하였다. 도성 안의 공간은 산세의 영향을 받아 서북쪽에 궁궐과 관아가 배치되어 남산을 중심으로 동 · 서 경계가 구분되었으며 오공산-남산-부흥산으로 이어지는 지형 때문에 선의문(宣義門)-십자가(十字街)-숭인문(崇仁門)으로 관통하는 도로를 경계로 남북 구분선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국초부터 개경 황성(皇城)의 조성과 함께 개경 주변에는 왕릉이 조성되었으며 많은 사찰을 건립하여 점차 나성(羅城)과 4교(四郊)로까지 확대되었다.

황성을 중심으로 광화문과 남대문을 연결하는 남대가에 이어 북쪽의 안화문(태화문), 성도문(북성문), 영창문(탐현문)을 연결하고 동쪽의 숭인문과 동남쪽 장패문(보정문), 남쪽의 회빈문(고남문), 서쪽의 선의문(오정문), 영평문(눌리문), 통덕문(도찰문)을 연결하였다.

또 도성 안의 물길인 백천(白川)과 도성 밖의 사천(沙川)을 건너기 위해 많은 교량을 건설하여 도로교통의 편리를 증진하였다. 백천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부교(兵部橋), 금오위남교(金吾衛南橋) 등은 궁궐과 연결되는 중요 교량이었으며 노군교(勞軍橋), 당상교(堂上橋), 피정교(皮井橋) 등도 도성 중앙의 도로교통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도성 안에는 국왕의 행차에 필요한 전용도로인 어가(御街)가 조성되었다. 어가는 황성과 외성(外城)에 이르는 중심대로로 정전인 회경전(會慶殿)에서 시작하여 나성의 성문을 지나 지방으로 연결되었는데 아마도 군대의 사열, 격구 시범, 사신 행렬 등과 같은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로 폭에 대해서는 『주례』의 기준이 도입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경복궁 대로가 9궤(軌)인 점을 고려하면 이에 상응한 노폭으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개경의 도성도로는 중국 등의 고대 도성에서와 같은 주작대로(朱雀大路)의 모습을 띠지 않고 지형과 수세에 따라 격자형이 아니라 불규칙한 형태였다. 도성 내의 관도(官道)와 사찰참배 도로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사찰 및 왕릉 건립과 참배노선

개경 주변으로는 수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었는데 이들은 왕실의 원당(願堂),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라는 본연의 임무는 물론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개경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도 함께 하였다.

국청사는 개경 서쪽의 관문에 위치하여 교통과 방어의 중심지였으며 천수사 역시 남쪽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흥왕사는 전쟁 시 남쪽의 이궁(離宮)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개경이 황성을 중심으로 도시구획과 함께 나성, 4교(郊)로 확장되자 주변에 설립된 사찰들은 개경의 방어뿐만 아니라 교통로로서의 역할과 함께 왕실의 사냥터, 연회장소로 이용되어 정치 · 사회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외에 왕릉 참배에 따른 도로의 확장 · 보수가 활발하였다. 이들 왕릉들은 송악을 기준으로 교외의 나성 서쪽은 봉명산 · 만수산 등 기슭에, 남쪽의 진봉산 · 부소산 일대 그리고 동쪽으로 용흥동 서쪽산과 송림현 · 장단현과 북쪽의 오관산 등에 위치함으로써 개경의 황성으로부터 왕릉 참배지까지 국왕의 잦은 행차에 따른 도로의 개설과 보수가 활발하게 되었다고 본다.

고려의 지방도로

고려의 지방도로는 삼국시대의 교통로에 기반을 두었는데, 이후 지방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점차 체계적으로 발달하였다. 개경과 도 · 부 · 목 · 군 · 현의 치소 간에 중앙과 지방 사이의 왕명이나 군령의 전달, 조세의 수송, 외관 및 사신의 왕래와 같은 목적에 따라서 삼국시대에 조성된 교통로가 점차 확대 · 발전된 것이다. 특히 국왕의 서경(西京: 평양) 및 남경(南京: 양주)에로의 지방 순행에 따라 간선도로가 크게 발달하였다.

개경에서 장단현을 거쳐 광주-이천을 지나 충주, 상주방면으로 연결되는 ‘장단도로(長湍渡路)’와 문종대 남경 설치 후 개경과 남경 직로 외에 개경과 남방의 지방 군현 사이의 교통로는 ‘임진도로(臨津渡路)’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개경의 청교역에서 출발하여 통파역(임진)-마산역(파주)-벽지역(고양)-영서역, 청파역, 노원역이 있는 남경에 이르는 역로 조직도 함께 발달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도로유적은 단독적으로 확인되기보다 삼국이나 통일신라 시기 축조된 도로와 연계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마산 중리 유적의 도로 유구는 삼국 시대의 도로가 지속적으로 사용된 도로와 축조방법을 달리하는 유구이다. 자연퇴적층에 측구 부분인 양 가장자리만 굴착하여 구축하였다. 도로면은 30∼70cm 정도의 천석과 할석으로 석재의 반듯한 면이 바깥쪽을 향하도록 외열을 맞추어 3∼4단을 축조하였다. 바닥은 경계석을 쌓고 내부에 점토 · 모래 · 잔자갈 등을 혼합하여 다짐처리를 하고 측구는 천석과 할석으로 들여 쌓고 뒷면은 자갈을 채웠다.

조선시대의 도로

조선의 도로정책과 도로체계

한양천도와 도성의 도로 정책

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 세력들은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예치(禮治)사상을 반영한 새 도시건설과 함께 도로를 정비하였다. 도성 안의 도로계획 또한 한양 천도 이후 1393년(태조 2) 2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 성석린(成石璘)과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 김주(金湊) ·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염(李恬)으로 하여금 조운(漕運)의 편리 유무와 도로 노정의 험난과 평탄 여부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윽고 1394년(태조 3) 9월에는 정도전 등에게 한양의 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1394년경에 도로에 대한 기본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1399년(정종 원년) 3월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어떻게 진척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1405년(태종 5) 10월 한양으로 재천도한 이후 1414년(태종 14)에 걸쳐 창덕궁 건립, 혜정교∼창덕궁 방면이나 종루∼남대문과 숭례문 방면의 시전 행랑이 완공됨으로써 시가지의 형성과 함께 도로도 어느 정도 정비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위와 같은 여건 속에서 태종대에 도로제도를 점차 정비하게 되었는데 1407년(태종7) 4월 한성부에서 5부 각 방의 이름과 교량 및 거리의 이름을 세우도록 조치하고, 화재방지용 물독[水甕] 설치, 길가 집 앞 나무심기, 냇가 양쪽에 제방 쌓아 나무심기를 주장함과 동시에 성안의 큰 길 이외에 동네의 각 도로도 평평하게 수레가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414년(태종 14) 10월에 이르러 도로의 멀고 가까움이 일정하지 않아 사신의 파견이나 조세를 납부하는 기한을 정하는데 불편하므로 도로의 거리에 따라 후자(堠子)를 설치, 10리마다 소후(小堠), 30리마다 대후(大堠)를 설치하여 1식(息)으로 삼는 이정표 제도가 확립되었다. 또, 도성안의 도로 폭에 대한 규정도 제안하였다. 1415년(태종 15) 8월에는 백성들의 도로 침범을 막고 9궤(軌), 7궤 등의 고제(古制)에 따른 도로 폭 규정과 개천 양안의 정비, 성 안팎의 도로개설 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도로에 관한 구체적 대책은 세종대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1426년(세종 8)에 일어난 대화재 사건으로 말미암아 방화 대책의 하나로서 행랑에 방화용 담장을 쌓거나 관청 가까운 가옥을 철거하고 행랑과 주택 사이에 우물을 파서 물을 저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내의 도로를 사방으로 개통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426년 4월에 한성부와 호조, 공조가 함께 의논한 결과 도성의 도로 폭은 대로는 7궤, 중로는 2궤, 소로는 1궤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 외에 도성의 도로 확보를 위해 성안의 도로를 침범한 가옥에 대해서 철거 조치를 취하거나 화재 예방책으로서 각 방의 민가에도 도로를 개통하도록 조치하였다. 즉, 1431년(세종 13) 4월에 민호를 나누어 동리를 만들고 방리 사이에 도로를 개통하여 화재 피해를 방지하자고 하였다. 이와 같은 도로 규정에 대한 개선책은 논란을 거듭한 결과 성종대에 이르러 『경국대전』 공전 교량조에 대로는 넓이 56척, 중로 16척, 소로는 11척으로 하고 도로 양편의 수구는 각 2척으로 확정함으로써 도성안의 도로 규정이 제도화되었다.

도성의 도로망

도성안의 주요 도로망은 경복궁, 창덕궁 및 종묘, 사직단 그리고 4대문4소문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망과 방리 및 각 사(司) 그리고 하천을 따라 형성된 지선도로가 형성되었다.

도성안의 중요도에 따라 대로는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 앞길과 동쪽의 흥인문, 서쪽의 경희궁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와 숭례문에서 대광통교(종로네거리) 연결 도로이다. 중로는 종가(鍾街-종로3가)에서 돈화문, 종로4가에서 종묘를 따라 창덕궁, 혜화문에 이르는 도로, 소광통교(을지로입구)∼ 광희문, 사직단에서 세종로, 중학동 지나 청진동에 이르는 도로 등이다.

도성의 대문과 지방으로 연결되는 성밖 도로노선의 기점은 숭례문과 흥인문을 중심으로 창의문, 돈의문, 소의문, 혜화문, 광희문이었다. 먼저 서북 방향은 숭례문에서 출발하여 자연암(紫煙巖) 신교(新橋)-기영(畿營) 초교(草橋)- 모화관(慕華館) 영은문(迎恩門)-무악현(毋岳峴)- 홍제원(弘濟院)-병전거리(餠廛巨里)로 연결되어 제1대로인 의주대로(義州大路)로 연결되었다.

남쪽 방향은 숭례문에서 출발, 이문동(里門洞)-주교(舟橋)-청파역(靑坡驛)-석우참(石隅站)(分岐)-와요현(瓦窯峴)-판전거리(飯廛巨里)-동작진(銅雀津)에서 제8대로에 연결되며, 석우참(石隅站)에서 분기(分岐)하여→둔지산(屯之山)-서빙고진(西氷庫津)과 당현(堂峴)-만초천(蔓草川)-습진기(習陣基)- 노량진(露梁津)을 통하여 제7대로에 연결되었다.

서쪽 방향은 숭례문에서 출발하여 악전현(樂田峴-分岐)-아현(阿峴) 노고산(老姑山)-창천(倉川-分岐)-와우산(臥牛山)-양화도(楊花渡)를 건너 제6대로에 연결되며, 악전현(樂田峴) 분기점에서 만리현(萬里峴)-마포진(麻浦津)-방학호진(放鶴湖津)을 지나 시흥으로 가는 첩로(捷路)이며, 또 창천 분기점에서 광흥창(廣興倉)-서강진(西江津)-율도(栗島), 여의도(汝矣島)-영등포(英登浦)-기탄석교(岐灘石橋)를 지나 인천으로 가는 첩로이다.

동북 방향은 흥인문을 출발, 동묘(東廟-分岐)-보제원(普濟院)-안암동천(安巖洞川)-제기현(祭基峴)-고암(鼓巖-分岐)-수유현(水踰峴)를 지나 제2대로인 경흥로에 연결되는 길이며, 동묘에서 분기하여 영도교(永渡橋)-왕심리(旺深里)-차현(車峴)-전곶(箭串) 제반교(濟礬橋)를 지나 제5대로로 연결, 고암(鼓巖)에서 분기하여 안락현(安樂峴)-중랑포(中梁浦)를 거쳐 제3대로에 연결하는 길이다.

그리고 창의문에서 북쪽으로 총융신영(摠戎新營)-평창(平倉)- 북한산성 남문-행궁(行宮)에 이르는 도로, 창의문 서북쪽으로 한북관(漢北關)-병전거리(餠廛巨里)를 지나 제1대로로 연결하거나, 돈의문의 서쪽으로 기영(畿營)-모화관(慕華館)-아현(阿峴)을 지나 제6대로에 연결, 소의문(昭義門)의 경우 서쪽으로 아현을 지나 제6대로에, 혜화문에서 동북쪽으로 적유현(狄踰峴)-수유현(水踰峴)를 거쳐 제2대로로 연결되는 도로이며, 광희문에서 동남쪽으로 제반교(濟礬橋)-한강진, 두모포(豆毛浦) 저자도(楮子島)까지 연결되는 도로 노선이 발달되었다.

지방의 도로망

지방 도로망은 중앙과 지방 군현의 치소 사이, 군현과 군현 또는 감영, 병영 및 수영 외에 진보 등과의 상호연락과 사행(使行) 및 온행(溫幸) 그리고 물자수송을 위해 정비하였다. 중요 도로망은 9대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0대로( 『대동지지(大東地志』), 6대로( 『도로고(道路攷)』) 등으로 구분하여 이용되었다.

먼저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에 의한 6대로는 제1로 의주로(義州路, 경성의 홍제원∼의주), 제2로 경흥로(慶興路, 수유리점∼서수라보)에 이르는 길, 제3로 평해로(平海路, 망우리현∼평해)에 이르는 길, 제4로 동래로(東萊路, 한강∼부산진)에 이르는 길, 제5로 제주로(濟州路, 동작진∼제주)에 이르는 길, 제6로 강화로(江華路, 양화도∼강화부)에 이르는 길을 들 수 있다.

이외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에서는 봉화로(奉化路, 전곶교-송파진-광주-이천-음죽-단양-풍기-영천-봉화)와 수원별로(水原別路, 노량진-시흥-안양행궁-수원행궁-건릉), 충청수영로(忠淸水營路, 소사점-평택-충청수영), 통영별로(統營別路, 삼례역-전주-남원 오수역-운봉-함양-산청-진주-사천-고성-통영)가 추가되었다.

도로의 관리

도로에 대한 관리는 공조와 형조에서 맡았다. 형조소속의 장금사(掌禁司)는 도로 불법 이용 등을 단속하는 도로금령(道路禁令)이나 진량(津梁) 등의 일을 맡았으며, 공조 소속 아문인 영조사(營造司)는 궁실과 성지, 공해, 옥우 및 도로의 토목, 공역 등의 일을 맡았다. 한성부에서는 도돈체사(道頓遞使)를 임명하여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도로의 거리를 측정하는 도구는 기리고거(記里鼓車)를 사용하였다.

도로의 보수는 국왕의 행행(行幸)이나 사신 왕래의 경우, 그리고 강무(講武-군사훈련)나 온천에 행차할 때에 주로 실시하였다. 지방에서는 도로 주변의 읍민의 부역이나 농민 그리고 승도들을 동원하여 수치(修治)하는 경우가 많았고, 도성의 경우엔 5부 방민이나 훈조계공인(燻造契貢人)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1787년(정조 11) 6월 영우원(永祐園) 행차로에 있는 안락현(安樂峴-현재 청량리∼중랑교 사이)이 수재로 파손되자 안락현 동쪽은 양주의 원소군(園所軍-왕릉 수호군)이, 서쪽은 훈조계공인이 보수를 맡았던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또 경기도 고양, 파주, 교하의 능행로에서는 교계(橋契)를 상설하여 보수하기도 하였다.

도로보수 과정에서 농민들의 민전을 침범한다든지 곡식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도로 수치에 징발된 역부나 전부들에게 대동미와 같은 조세를 감면하거나 전답의 소출 부족분을 보충해주기도 하였다.

실학자의 도로개혁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상품경제의 발달과 군사외교 및 교통 운송상의 이유로 도로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특히 실학자들은 상품 화폐경제를 진흥시킨다는 목적에서 도로의 중요성을 크게 인식하였다. 그 결과 교통체계를 효과적으로 관리,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로의 수치와 교통수단의 개선을 주장하였다.

실학자 가운데 도로에 대해 선구적으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유형원(柳馨遠)이다. 그는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도로의 수축은 협착한 도로의 지형을 그대로 하지 말고 평탄하게 개수하여 수레가 다닐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도성의 내로(內路)는 대로 36보(步, 1보=5척 가량), 중로 18보, 소로 9보로 확장하고, 외방의 읍성(邑城) 내로(內路)는 대로 18보, 중로 9보, 소로 6보로 하고 기타 도로 즉, 각도로부터 서울로 통하는 길은 12보, 고을과 고을로 통하는 길은 9보, 각 촌락에서 고을로 통하는 길은 6보로 정하여 도로망을 확충할 것을 제안하였다.

또한 당시 수레통행 문제에 대하여 지형조건을 구실삼아 통행할 수 없다고 반대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각 사와 제읍 · 영 · 진 그리고 각 역에 대거(大車) · 편거(便車) · 곡거(曲車) 등의 수레를 비치하여 물건을 수송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한편 지방의 도로변 각 역참 근처에 참점(站店-酒店의 일종)과 포자(鋪子-廛房)를 설치하여 사객(使客)을 지공(支供)하고 화폐유통의 촉진과 상공업을 진흥하자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익(李瀷)은 『성호잡저(星湖雜著)』병제에서 도로의 중요성과 수레 이용에 대해서 “우리나라의 지세가 비록 험하나 절반은 평탄하고 넓은 길이 있다. 그런데 길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수레를 이용하지 못한다. ...(중략)… 우리도 옛길을 닦아서 고친다면 비록 짐을 싣는 큰 수레라도 국토의 태반을 다닐 수 있다.”고 도로의 개수를 역설하여 승거(乘車), 병거(兵車) 등 어떠한 수레도 다닐 수 있게 만들 것을 주장했다.

북학파의 한 사람인 유수원(柳壽垣)은 상공업의 발달과 기술 중심의 사회개혁을 추진하면서 『우서(迂書)』에서 상업을 진흥시키는 방안으로서 교량과 도로의 건설을 역설하였다. 도로를 ‘물화(物貨)의 유통로’로 인식하여 도로의 건설은 우마나 수레의 이용을 원활하게 하며 결국 물화의 유통을 촉진시켜 상업을 진흥시킨다고 보았다.

홍양호(洪良浩)『목민대방(牧民大方)』에서 “수레를 이용함으로써 백화(百貨)가 유통된다”고 하여 상업 진흥을 위해 중국의 제거법(製車法)을 배우자고 주장하였다. 특히 “ 이용후생이 목민(牧民)의 도(道)”라고 전제하고 산업발달의 기초조건으로서 제언, 교량, 도로, 산택(山澤) 등의 관리를 강조하고 도로 좌우에 가로수를 심어 읍리를 보호하자고 하였다.

홍대용(洪大容) 역시 『담헌서(湛軒書)』에서 교통공학적 측면에서 수레 제작의 과학적 기술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도로의 정치, 군사적 기능보다 경제적 기능을 중시하여 관물, 공납물의 수송만이 아니라 민간 물화의 운송로로서 도로를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박지원『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상공업의 진흥과 화폐유통 및 주거(舟車)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수레는 물의 배요 이동하는 집”이라 하고 중국에 재화가 풍족한 것은 수레를 이용함으로써 물화가 유통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 외에, 신경준은 『도로고』에서 “치정의 근본을 치도(治道)”라 하고 도로 노정의 과학적 측량을 제시하고 능행로, 온천로, 역로, 파발로 및 6대로 노선을 정리하고, 교통수단으로서의 거제책(車制策), 수차도설(水車圖說) 등을 저술하여 실용적 도로관을 보여주고 있다.

박제가『북학의(北學議)』에서 “상업이 발달하려면 우선 교통이 발달하여야 한다”고 하고 도로, 교량의 국가적 확장, 수레 · 선박 등의 제작, 보급으로 교통수단이 혁신되어 교통망, 경제망이 형성되어야 상업이 발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수레와 선박을 쓰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며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 생산물의 교역과 상공업이 같이 발달한다고 보아 수레, 선박의 이용을 통한 국내 및 해외통상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의 실학자들은 상공업의 진흥과 국내와 물자의 유통을 위해서 도로 개수 및 수레의 활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화시기의 도로 실태 및 개화지식인의 도로관

서양인이 본 도로실태

개화시기 선교사를 포함한 많은 서양인들은 그들의 견문기록을 통해 당시 조선의 도로 실정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비숍(Bishop, I. B.)은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하루 낮이 걸린다. (중략) 도로의 너비는 겨우 1m 내외로 논둑 밭둑을 지나는 길고 꼬불꼬불한 돌멩이투성이 길이다.”라고 한다든지 “국민 생활의 동맥이라고 할 도로의 불안전함이 한국과 같음은 지구상에 비교할 곳이 없다. (중략) 도로는 또한 온갖 오물의 집적소이다”라고 할 정도로 도로의 관리 실태는 매우 불안전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묄렌도르프(Mollendorf, P. G. von) 역시 “길은 조악하고 교량은 드물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에 비해 일본의 도로 사정은 우리보다 훨씬 나았다.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던 김기수(金綺秀)『일동기유(日東記游)』에서 “도로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었으므로 비가 내려도 길이 깨끗하다. (중략) 도로와 거리는 평평하고 곧고 바르게 되어 있어서 길 모서리가 삐쭉 튀어나오지 않고 뒷골목도 구부러져 있지 않아서 (중략) 마치 목수가 일할 때 사용하는 먹줄을 치는 것 같아서 (중략) 도로의 정결함이 맨발로 다녀도 더렵혀지지 않을 정도이다”라고 표현될 정도로 평탄하고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개화기 지식인의 도로관

1882년(고종 9) 일본에 다녀온 김옥균(金玉均)은 “나라를 부강시키려면 산업을 개발해야 하고 산업을 개발하려면 치도를 먼저 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를 위해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이 필요하다고 하고 구체적으로 『치도약론(治道略論)』에서 치도, 즉 도로의 개선과 정비를 주장하였다. 도로의 개선은 교통 발전의 요체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치도국(治道局)의 설치를 비롯하여, 치도 기술자의 양성과 필요한 기계의 구비, 오물처리법, 감독 · 순검의 설치와 감독의 내역, 인력거(人力車)와 마력거(馬力車)의 운행 등 도로개선론도 제시하였다. 김옥균의 도로개선론은 도로의 수치를 통해 근대적인 국가로 부강해질 수 있다는 새로운 자기인식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도로

통감부 시기 치도국(治道局)의 설치와 도로 건설

일제는 철도 · 도로 · 항만 등의 교통시설과 통신시설 등을 설치하여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1906년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시정 개선에 관하여 “농업은 교통의 편리함에 의해 발달하며 물산이 있어도 이를 수송하는 방도가 없다면 불가하다.”고 하면서 도로의 개설을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통감부는 시정 개선이라는 명목 하에 일본흥업은행에서 유치한 1,000원의 차관을 바탕으로 1906년 4월 내부(內部)에 치도국, 각 도에는 치도공사소를 설치하는 한편 일본인 기사 4명을 고용하여 영산강-목포, 대구-경주-영일만, 진남포-평양-원산, 금강-군산에 이르는 지역을 조사하고 도로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들 지역은 조선 쌀의 대일 수출로서 일제의 종관철도정책에 따른 동서연결도로의 건설지역과 일치하고 있으므로 이 시기 도로의 건설은 철도와 항만 또는 대읍(大邑)을 연결하고 한국 내지의 종관 철도 및 연안 항해를 연결하는 것을 중요한 특징으로 하였다.

그 후 6월에는 치도국을 토목국으로 변경하여 토목국 처무규정에 의하면 토목행정을 비롯하여 관유지 처분, 도로교량 신설 및 관리, 시가지 개량, 하천 · 항만의 측량 등에 관한 사항을 담당함으로써 조선의 도로건설은 일제 통감부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에 따라 1907년 진남포-평양, 목포-광주, 군산-전주, 대구-경주간의 도로공사를 착수하였으며, 1908년에는 수원-이천, 신마산-진주, 공주-소정리, 신안주-영변, 황주정거장선, 신의주-마전동선, 해주-용당포 간의 도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1909년에는 의병 귀순자들의 생업을 도와준다는 명목 하에 해남-하동선과 청진-경성 연장선, 1910년에는 진남포-광양만, 경주-포항, 사리원-재령, 천안-온양, 청주-조치원, 대구-칠곡, 함흥-서호진, 영흥-유도, 청진-회령, 무산령 부근, 전주-광주선 부근, 함북 마천령, 마운령, 남갈령, 함관령 등의 도로공사에 착수하였다.

총독부 시기의 도로 정책과 도로 건설

조선총독부의 도로 정책은 1911년 4월 제정한 ‘도로규칙’과 1915년의 ‘개정도로규칙'에 따른 것이었다. 도로규칙은 군사 · 정치 · 경제상의 견지에서 도로의 등급을 나누고, 도로의 관리 주체를 정하여 그 축조 및 유지수선의 담당자를 명확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로수축 표준을 정하여 도로의 폭, 경사면에 관한 축조상의 규정을 마련하였다. 또한 육군성의 의병토벌과 전쟁수행에 필요한 군용차량의 통과에 중점을 두었다.

도로규칙의 주요한 내용은 도로를 1등도로 · 2등도로 · 3등도로 · 등외도로로 구분하였다. 각 도로의 등급은 행정적인 측면과 군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정하여졌으며, 도로의 관리는 1등도로와 2등도로는 조선총독, 3등도로는 도장관, 등외도로는 부윤 · 군수 및 도사(島司)가 담당하도록 하였다.

통감시기의 도로 건설이 내부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것에 비해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총독부 시기의 도로 건설에는 군부(軍部)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개화기의 도로 건설이 경제적인 목적에 치우쳤다면 일제 강점 이후에는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기 위한 의도, 즉 도로 건설을 통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도로규칙을 공포함과 동시에 1911년 4월 17일 ‘토지수용령’을 공포하여 도로용지를 강제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토지수용령에 근거하여 일제는 조선인의 토지를 ‘인민의 임의 기부’라는 형식을 채택하여 토지보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11년 하차취체규칙(荷車取締規則), 1912년 자전차취체규칙, 1913년 도로취체규칙, 1915년 자동차취체규칙 등 도로교통과 관련된 단속 규정도 마련함으로써 식민지 조선에서 도로교통에 대한 기본적인 제도와 통제 장치가 마련되었다. 위와 같은 도로 규칙과 관리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건설한 도로의 52.14%가 1910년대에 건설되어 우리나라 근대 도로의 기본 형태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 도로건설의 특징은 주로 대륙루트, 북한지방, 그리고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철도와 마찬가지로 도로도 제국주의 일본의 대륙침략의 수단으로써 정책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북한지방과 호남지방에 도로 건설이 집중된 것은 식량과 자원의 수탈 등 경제적인 측면에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0년대의 도로정책

제1기 치도사업기의 도로 건설은 전체 도로 길이의 40%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조선총독부는 1917년 11월부터 1922년까지 6개년을 계획으로 제2기 치도사업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제2기 치도계획은 3 · 1운동으로 인해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용지기부와 부역제도를 폐지함으로써 노임 등 건설비용을 조선총독부가 부담해야 하였으므로 도로건설 예산이 급등하게 되었다. 게다가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전쟁특수가 사라지면서 일제는 장기적인 경제불황에 돌입한 것도 도로 건설에 장애가 되었다.

실제 1922년 완성해야 할 도로가 1,880㎞였지만 1922년까지 건설된 도로는 재해구재를 위한 도로 연장 214㎞를 포함하여 1,011㎞뿐이다. 또한 교량 역시 9개를 건설하기로 했던 기존 계획에 비해 대동강 가교 건설공사의 일부만이 진행됐을 뿐이다. 따라서 남은 868㎞의 도로와 8개의 교량공사는 시작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제2기 치도사업은 1938년 ‘조선도로령’이 공포될 때까지로 연장되었다.

관광도로 및 광산도로 건설

한편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관광도로나 광산도로와 같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용도로 도로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923년 인천 월미도공원의 완성과 함께 인천역에서 월미도공원까지의 도로를 확장하였고 1936년에도 도로가 협소하여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여 6m 도로를 12m 도로로 확장하는 예산을 편성하여 1937년 11월말 준공하였다.

또한 1929년 9월 15일에는 평양의 모란대 주암산에 관광도로가 개통되었으며, 1931년 개성부에서는 관광도시의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개성시내에 관광도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938년에는 마산-진해간의 관광도로의 건설을 위한 답사가 행해졌으며, 1939년 4월 10일에는 부산-송도 간의 관광도로공사가 착공되었다. 이러한 관광도로의 건설은 인천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방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1938년에 조선의 광산지대에 광산도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또 경상남도에서도 ‘비상시국 하의 국방산업을 진흥’하기 위하여 1938년 협천, 거창 양군의 금산지에 광산도로를 건설하고자 계획하였다. 이는 지방산업의 발전과 전시체제에 따른 도로건설의 요구가 점증하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1938년 4월 4일 종래의 도로규칙이 폐지되고 제령(制令) 제15호로서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이 공포되었다. 조선도로령이 기존의 도로규칙과 다른 점은 제령으로 공포되었으며, 도로의 종류를 기존의 1등도로 · 2등도로 · 3등도로 · 등외도로에서 국도 · 지방도 · 부도 · 읍면도로 구분하여 국도는 조선총독, 지방도는 도지사, 부도는 부윤, 읍면도는 읍면장이 각각 관리하게 하였다. 경성에서 방사상으로 10개 방향에 뻗어나가도록 되어 있어 마치 조선시대의 ‘10대로’를 연상하게 하였다.

이 당시 조선도로령의 실시는 자동차의 증가에 따른 도로의 손실을 자동차사업자에게 부담시키면서 도로에 대한 국가, 즉 조선총독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전시체제기에 접어들면서 전쟁물자의 수송 등 도로와 자동차운송에 대한 통제가 더욱 필요해졌기 때문이었다.

광복 이후의 도로

광복 직후 도로와 미군정시기 도로사업

1945년 8월 광복 당시의 도로 구분은 조선총독부령인 조선도로령에 따라 국도, 지방도, 시군도로 구분되었다. 국도와 지방도, 군면도가 도로 종별 기준인데 비해 시도는 도로 소재 지역을 기준점으로 한 점이 다르다.

도로 규모는 국도의 폭이 6∼7m, 지방도는 4∼5.5m 정도로 빈약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도로는 국도 5,263㎞, 지방도 9,997㎞, 시군도 8,771㎞로 총연장 24,031㎞이며 군사전용도로 1,700㎞가 전부였다. 대부분 자갈길이며 포장도로는 겨우 1,066㎞, 포장율 0.026%로서 세계적으로도 최하위 수준이었다.

미군정은 1947년부터 경제협조처(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사업에 의한 구조적 건설사업을 착수하였다. 중앙 정부의 상무부 토목국을 토목부로 승격시키고 그 아래 도로국 · 이수국 · 도시국 · 측지국을 두었고 부평에 중기사업소, 수원 · 대전 · 대구 · 부산에 국도사업소 등을 두어 도로 유지 및 수리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렇게 해서 진행된 첫도로 사업은 1946년 8월에 서울∼부산 간 국도의 정비개량과 포장공사였다. 한국전쟁으로 한때 중단되었으나 휴전 후 지속되어 1971년 2월에야 전구간의 포장이 완공되었다. 미군정말기 1947년도 도로현황은 국도 5,213㎞, 지방도 10,131㎞, 시군도 9,839㎞였다.

미군정시기 도로사업의 특징은 첫째, 일제의 태평양전쟁 수행으로 황폐해진 도로의 개수, 정비였다는 점, 둘째, 전후 전재민(실업자) 구호사업의 하나로 도로 개수 및 보수사업을 실시한 점이다.

한국전쟁 전후의 도로 사업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미군정 조직을 11월에 개편하여 도로관련 행정기구는 내무부 토목국 산하에 도로과를 두고 1949년 5월에 지방관서 설치법을 제정하여 서울 · 익산 · 부산에 지방건설국(지방국토관리청의 전신)을 신설하였다. 그리고 1948년 12월 한미경제원조협정이 체결되어 도로사업도 경제협조처 원조자금으로 시행되었는데 당시 8억원 예산으로 충주 달천교, 밀양 수산교, 낙동교 등 주요 교량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으로 인한 교량의 피해는 1,466개소(총 연장 38㎞)였다. 포장도로는 폭격 또는 군용장비 등의 과중한 통행으로 1944년의 1,066㎞에서 1951년엔 580㎞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전쟁 도중에도 유엔군은 작전과 병참을 위해 국토의 남북 방향과 동서방향의 도로를 최신 장비와 기술로 건설함으로써 오늘날의 국도 및 지방도의 뼈대를 형성하였고 목교 · 부교 · 장간조립교 등 군용교량도 많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로 · 교량의 복구는 1954년부터 미국국제협조처원조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등의 원조자금이 투입되면서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58년 한강 인도교가 복구되고 1962년까지 지방도 및 교량 대부분이 회복되었다. 한편, 복구사업과 병행하여 서울∼부산 간 국도포장공사를 연차적으로 실시하고 또 장대교량 건설도 진행되었다. 그러나 1957년에 수립된 경제부흥 도로사업5개년 계획은 막대한 자급 소요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 1960년 제2공화국에서 폐기되었다.

경제개발5개년사업에 따른 도로사업

1960년 8월 제2공화국 시기에 ‘국토건설본부’를 설치하였으나 정치적 혼란으로 착수하지 못하다가 1961년 5월 제3공화국에 이르러 국토개발 및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이 수립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른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7)’은 경제자립과 공업화의 기반 조성이라는 목표아래 교량건설, 주요도로 포장, 도로개수 및 유지, 산업도로 개발 등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교량은 431개소 총연장 18㎞가 건설되었는데 제2한강교, 형산교, 여주교, 삼척교 등이 대표적이다. 산업도로의 경우는 태백산지리산 지역의 탄광개발을 목적으로 73.7㎞를 건설하였고, 주요도로 포장은 서울∼춘천간(75.4㎞), 천안∼유성간(60.0㎞), 대전∼영동간(52.8㎞), 홍천∼한계리간(84.3㎞), 금천∼왜관간(33.0㎞), 춘천∼원주간(40.4㎞) 등 약 488㎞를 건설하였다. 도로개수의 경우 노폭의 확장, 개수 및 선형 개량 등 10㎞를 개보수하였다.

제1차 5개년계획(이하 ‘경제개발계획’이라 약칭함) 동안에 전국 도로연장은 국도 2,500㎞, 특별시도 1,800㎞, 시군도 3,000㎞ 등 총 7,300㎞가 축조되어 5년간에 26%나 증가하게 되었다. 도로 포장율 역시 5.8% 증가하게 되었다.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은 경제성장에 따른 수송력 부족을 타개하기 위하여 산업구조의 근대화와 자립경제 확립에 맞추어 도로사업도 산업의 지방분산과 단거리 수송력을 증가하기 위하여 도로망 정비 및 도로 포장과 함께 유지보수를 강화하였다.

또 1968년에 도로정비촉진법과 도로정비사업특별회계법을 제정하여 도로정책과 도로사업이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자동차 전용도로인 고속국도의 건설이었다. 그리하여 1967년 3월 서울∼인천선의 착공을 시작으로 계획기간 내에 서울∼인천선(29.5㎞), 서울∼부산선(428㎞), 대전∼전주간(79㎞), 신갈∼새말간(104㎞) 등 총연장 655㎞의 고속국도가 건설되어 우리나라 역사상 고속국도시대를 열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 도로포장 사업 실적은 705㎞를 건설하였으며, 교량 역시 백제교(813m), 팔달교(324m), 양평교(625m)외에 5대 도서의 연육교 사업으로 완도교 등을 건설하였다.

제3차 경제개발계획(1972∼1976) 기간에는 제1 · 2차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으로 경제규모가 확대되고 수송량 및 자동차의 증가 그리고 고속국도의 건설에 따라 철도 비중보다는 상대적으로 도로의 수송분담 비율이 커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1970년대의 국도 포장율이 23.7%에 불과하여 고속국도망의 확충과 국도의 개수 및 도로 포장의 확대가 요구되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1971년 6월 세계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차관도로 포장사업이 시작되고 1972년 2월 도로조사단을 발족시켜 운영하게 하였다. 그 결과 고속국도 487㎞와 포장도로 2.066㎞를 건설함으로써 1976년 말 전국의 도로 총연장은 45,514㎞이며 그 중 고속국도 1,142㎞(2.5%), 일반도로 8,232㎞(18.1%)이며 나머지는 특별시도, 지방도와 시군도로였다.

이 기간 고속국도의 건설은 1973년 11월 개통한 호남고속국도 중 전주∼순천간(172.3㎞)과 순천∼부산간(176.5㎞)은 우선 2차선만 건설하고 1975년에 영동고속국도의 새말∼강릉간(97㎞), 동해고속국도의 강릉∼묵호간(32㎞)을 완공시킴으로써 부산, 인천과 서울을 포함하여 한강, 낙동강 지역 경제망을 구축하고 호남 및 남해안 공업지대, 그리고 영동 동해지역을 관통하는 기간 고속국도망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도의 경우는 총연장 8,232㎞ 중 1976년 말 완공된 포장도로는 46% 정도 였으며 특히 지방도나 시 · 군 도로는 극히 미비한 실정이었으며 이에 따른 재원을 확보하고자 IBRD(국제개발은행)의 차관을 공여받아 광주∼충주간(81㎞), 성남∼광주간(15㎞) 등 국도 7개 노선 691㎞와 ADB(아시아개발은행)의 차관으로 인천∼수원간(42㎞), 논곡∼안양간(5㎞) 등을 착공하였다.

제4차 경제개발계획(1977∼1981) 때에는 공로(公路)의 수송체계를 정비하여 중 단거리 수송에 중점을 두고 국토의 종합적, 균형적 개발에 부응하는 도로망을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고속국도의 경우 1976년 착공한 대구∼마산선(84.5㎞)을 1977년 개통하게 되었고, 남해고속국도 중 부산∼마산구간(43.5㎞)의 부산∼냉정간(20.6㎞) 4차선 신설과 냉정∼마산간(22.9㎞)을 4차선으로 확장하여 창원 공업기지와 마산임해공단의 교통소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1981년 말 고속국도 104㎞(총연장 1,245㎞)를 건설하고, 도로 포장사업은 고속국도(100%),국도 3,028㎞(총연장 12,247㎞ 대비 55.3%), 지방도 305㎞(총연장 10,013㎞ 대비 11%), 시.군도 856㎞(총연장 17,428㎞ 대비 12.6%)를 포장하였다.

제5차 경제개발계획(1982∼1986)에서는 공업화와 산업구조의 고도화에 따라 공로 수송의 효율이 크게 증진되어 각 도로의 상호연계망을 구축하고자 남부내륙지방 연결망 개선, 소백산맥 관통 도로 등을 건설하였다. 그 결과 고속국도는 대구∼광주(182.9㎞)를 연결하는 이른바 ‘올림픽고속국도’를 1981년 10월 착공, 84년 6월 개통되어 영 · 호남간의 동서교류를 활성화시켰으며, 호남고속국도는 종래 2차선을 회덕∼논산간(48.5㎞), 논산∼광주간(122.2㎞)을 확장하였다. 구마고속국도의 이현∼옥포간(12.8㎞)의 4차선 확장, 남해고속국도의 마산∼신산리간(12.9㎞) 확장, 상문∼중촌리 간(3.7㎞)을 완공하는 등 총 183㎞를 건설하였다.

국도의 경우 후진지역 개발에 중점을 두어 경주∼포항 간, 전주∼울주 간, 청평∼춘천 간, 남원∼전주 간 등의 도로 확장과 포장사업을 추진한 결과 국도포장 2,676㎞(총연장 12,258㎞ 대비 포장율 77.1%), 지방도 포장 2,730㎞(총연장 10,013㎞ 대비 37.2%), 시.군도 4,411㎞(총연장 18,942㎞ 대비 34.9%)를 건설하였다.

제6차 경제개발계획(1987∼1991)은 경제선진화와 국민복지 증진을 기본목표로 지역사회의 균형발전과 수송 수요증가에 대비하여 1987년 12월 중부고속국도(145.3㎞)를 완공하고, 1991년 12월에는 신갈∼안산간(23.2㎞), 판교∼구리간(23.5㎞)의 완공과 서해안고속국도와 제2경인고속국도의 착공, 경부고속국도 양재∼청원간, 남해고속국도, 영동고속국도 확장 등 1991년 말에 이르러 고속국도 총연장은 1,597㎞로 증가되었다.

일반국도의 도로포장률은 1,690㎞를 포장하여 1986년도의 77.1%에서 1991년도에는 92% 정도로 증가하게 되었으며, 지방도는 총 연장 10,643㎞ 중 7,725㎞를 포장(포장률 72.6%), 군도는 총연장 13,627㎞ 중 6,762㎞(포장률 49.6%)를 달성하였다. 도로의 기하 구조에 맞지 않는 위험도로를 개량하기 위하여 국도 1,731㎞, 지방도 1,853㎞, 시 · 군도 3,728㎞를 개수하는 한편 교량도 216개 소를 건설하는 등 총 474개 소를 건설하였다.

제7차 경제개발계획(1992∼1996)은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사회적 형평성 제고와 균형발전, 그리고 국제화 자율화 추진과 통일기반 조성이라는 기본 전략에 따라 동서 9개 축, 남북 7개 축으로 이뤄지는 격자형 간선도로망 체계 구축과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지역 연결도로망 확충, 도시교통체계 개선을 통한 광역교통망체계를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수도권 교통난 해소를 위해 서울외곽 순환도로, 제2경인고속국도 건설을, 지역간 도로망 구축을 위해 중앙고속국도(대구∼춘천) 신설, 경부고속국도(한남∼회덕), 영동고속국도(신갈∼새말)의 확장을 시행하여 기간 중 고속국도는 289㎞ 건설, 426㎞ 확장하게 되었다. 일반도로의 경우는 포장사업을 적극 전개하여 국도 포장 1,045㎞(포장률 97.8%), 지방도 포장 4,820㎞(73.1%), 시 · 군도 6,792㎞(55.5%)를 포장하게 되었다.

현황

2000년대에 이르러 도로정책은 산업입지 지원 등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여 산업입지 패턴을 종래의 철도역에서 고속도로 주변으로 변화시키는 등 제조업 및 거점도시 성장을 촉진하였으며 국토공간상 시간과 거리 단축으로 전국의 1일 생활권화를 실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자연환경 훼손을 최소화하고 이용객 안전을 강화하는 인간 · 환경 중심의 정책으로 전환하여 환경친화적인 도로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도로안전 확보사업의 지속적인 추진(중앙분리대 설치, 낙석 · 산사태 방지, 노후교량 개축 등), 대도시권 교통혼잡 개선 사업(외곽순환고속도로망 구축), 소프트웨어 중심의 미래형 도로(도로 유지관리의 과학화, 첨단화), 동서축 간선망 보강 등을 추진하였다.

특히 도로망 확충과 정비사업에 대해서 살펴보면 첫째, 고속도로 건설은 1970년대의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남해 및 영동 고속도로,구마고속도로에 이어 1980년대에는 88올림픽고속도로(182.9㎞), 중부고속도로(117.8㎞) 건설과 1990년대 지역간 균형개발을 위해 퇴계원∼판교∼장수∼일산간(92.9㎞), 제2경인고속국도(15.8㎞), 서울∼안산간(14.3㎞) 외에 서해안, 중앙, 대전∼통영간, 중부내륙, 대전남부순환, 평택∼음성, 천안∼논산,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2000년대에 부산∼울산, 김천∼현풍, 평택∼음성, 익산∼장수, 전주∼광양, 무안∼광주, 청원∼상주, 대전∼당진, 공주∼서천 등 새로운 고속도로가 추진되었다. 또 대도시권의 고속도로 건설도 추진되어 수도권의 서울외곽순환선인 일산∼신평∼김포∼장수∼안양∼판교∼퇴계원 간(92.9㎞), 신갈∼안산 간, 부산권에서는 남해고속도로 내서∼냉정 간, 부산∼울산 간, 광주권의 고창∼장성∼담양간 및 무안∼광주고속도로 신설, 호남고속도로 구간인 동광주∼고서간 확장공사를 추진하였다. 2009년 현재 아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속도로 총연장은 3,776㎞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둘째 국도확충 사업은 ‘국도건설 5개년 계획(1차 2001∼2005, 2차 2006∼2010)에 국도의 건설 및 포장사업을 추진하였고 셋째, 도시부 교통혼잡을 해소하고자 대도시권 교통혼잡도로 개선, 국도대체우회도로 건설 넷째, 지방간선도로의 국가지원지방도 제도 실시, 다섯째, 민자도로 건설(인천공항, 천안∼논산, 대구∼부산, 일산∼퇴계원, 서울∼춘천, 서수원∼평택, 인천대교, 부산∼울산 등), 여섯째 통일시대 대비 남북도로 연결 사업(경의선, 동해선) 등을 추진하였다.

2009년 12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도로의 총연장은 104,983㎞, 도로포장률 79.2% 이다. 도로등급별로 보면 2009년 현재 국도는 13,819㎞, 특별 · 광역시도 18,749㎞, 지방도 18,138㎞, 시 · 군도 50,501㎞ 등 총연장 104,983㎞를 건설함으로써 도로연장과 포장률이 대폭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의 도로는 국내 여객, 화물 수송량의 90% 이상을 분담하는 국가교통망의 중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연도 고속도로 일반국도 특별광역시도 지방도 시.군도 합계
1990 1,551 12,161 12,298 10,558 19,796 56,715
1995 1,825 12,053 14,082 13,854 32,424 74,237
2000 2,131 12,413 17,839 17,151 39,240 88,775
2001 2,637 14,254 17,810 15,704 40,992 91,396
2002 2,778 14,232 18,224 17,084 43,719 96,037
2003 2,778 14,234 17,130 17,485 45,625 97,252
2004 2,923 14,246 17,371 17,476 48,262 100,278
2005 2,968 14,224 17,506 17,710 49,885 102,293
2006 3,103 14,225 17,738 17,677 49,318 102,061
2007 3,368 13,832 18,109 18,175 49,535 103,019
2008 3,447 13,905 18,517 18,193 50,174 104,236
2009 3,776 13,819 18,749 18,138 50,501 104,983
〈표〉 최근 연도별 도로 현황 (단위: ㎞)
*자료: 『도로현황조서』(국토해양부) 및 『2009년도 국토해양통계연보』(국토해양부,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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