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율하리 유적 ( )

목차
관련 정보
김해 율하리 고인돌 전경
김해 율하리 고인돌 전경
선사문화
유적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고인돌 · 돌널무덤 · 건물터 관련 생활유적.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고인돌 · 돌널무덤 · 건물터 관련 생활유적.
개설

율하리 일대가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지구로 개발되면서 유적의 전모가 알려지게 되었다. 율하리유적은 배후 산지의 말단 구릉에서 율하천 주변의 충적평야로 이어지는 지형적 요소를 갖고 있다. 또한 유적의 북동쪽은 김해평야를 형성하고 있는 낙동강 삼각주의 배후 분지와 매우 근접해 있다. 청동기시대 무덤과 주거지, 삼국시대 무덤은 배후산지의 능선부로부터 유적 중앙부까지 연장되는 구릉성 산지에 조성되어 있고, 주변의 저지대에는 대규모 묘역을 가진 청동기시대 묘역식 고인돌들이 연접해서 분포하고 있다. 저지대는 해발 8m~15m 사이로 지대가 낮으며, 소규모 곡부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에 묘역식 고인돌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통일신라시대 무덤은 배후산지의 말단 구릉에 조성되어 있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청동기시대 묘역식 고인돌과 돌널무덤 106기, 주거지 52동, 수혈·굴립주 건물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무덤 6기,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건물지와 무덤 등 여러 시대의 다종다양한 유구들이 조사되었다.

내용

청동기시대 유구는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단계는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단계로 청동기시대 전기 후반에 해당하고, 2단계는 청동기시대 후기 송국리문화 단계로 생활유구와 매장유구가 활발하게 조성되는 시기이다. 특히 2단계부터 유구의 성격에 따라 계획성있게 취락이 조성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3단계는 청동기시대 후기 후반에 해당하고 무덤과 주거지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다.

청동기시대 취락은 주거·저장·무덤·의례의 공간이 서로 분리된 구조를 보이고 있다. 특히 무덤과 주거공간의 구분은 뚜렷하다. 무덤공간은 구릉 말단과 저지대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묘역식 고인돌은 가장 규모가 큰 A2-19호묘를 중심으로 연접해서 배치되어 있다. 외곽으로 몇 기의 돌덧널무덤과 고인돌이 소규모 군집을 형성하기도 한다.

율하리유적 고인돌은 상석과 묘역을 갖추고 있으며 매장주체부는 깊게 굴착하여 조성하고 있다. 매장주체부는 다중 개석인데, 1단으로 덮은 것부터 6단까지 존재한다. 묘광은 깊고 넓은 편인데, 단을 지며 점차 좁히면서 깊게 굴착하였다. A1-11호묘의 경우 묘광의 길이는 1,370㎝, 너비는 830㎝, 깊이는 240㎝에 달한다. 묘역은 원형과 장방형으로 구분되며 A2-19호묘의 경우 묘역의 잔존 규모는 길이 20m 정도이다.

묘역식 고인돌은 크고 작은 묘역을 연접하여 거대한 군집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돌널무덤은 판석을 이용하여 상자형으로 축조한 것과 자갈돌을 쌓아올려 석곽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구분된다. 일부는 목관의 흔적도 확인된다. 돌널무덤은 길게 열을 지어 배치되어 있거나 여러 기가 군집을 이루고 축조되어 있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주로 구릉 사면에 조성되는데, 주거영역에는 저장공간과 생산공간이 배치되고, 일부 무덤이 열을 지어 분포하기도 한다. 매장영역에는 굴립주 건물지를 중심으로 한 의례공간이 포함된다.

삼국시대 무덤은 돌덧널무덤 2기가 조사되었는데, 서로 250㎝ 정도 이격되어 있고, 봉분이 유실되어 확실치 않지만 호석과 주구의 잔존 상태로 보아 주곽과 배장곽일 가능성이 높다. 출토 유물은 갑옷편과 철촉, 단경호 등이 있는데 이로 보아 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무덤은 장방형의 횡구식석실 4기로 경사면을 따라서 등간격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석실의 높은 쪽 경사면에는 호석과 주구를 갖추고 있다. 한 번의 추가장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출입구는 낮은 쪽 경사면에 위치한 단벽을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은 장군형토기·편구병·유개대부완 등이며, 이로 보아 석실들은 7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김해 율하리유적은 청동기시대 유구가 중심이며, 묘역을 갖춘 대형 고인돌을 중심으로 한 무덤군과 주거지·수혈유구·굴립주 건물지 등의 여러 취락 구성요소를 통해 청동기시대 후기 송국리문화 단계의 취락의 형성과 소멸과정을 이해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율하리유적은 분묘·의례공간과 주거공간을 갖춘 발전된 형태의 취락으로 사천 이금동유적, 진주 대평리유적과 더불어 청동기시대 후기 영남지역의 중심취락으로 상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해 율하리유적』(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8)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하승철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