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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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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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성인 서울 성곽의 4개의 작은 성문.
내용 요약

사소문은 조선 시대 도성인 서울 성곽의 4개의 작은 성문이다. 동북의 홍화문, 남서의 소덕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홍화문은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으로 혜화문으로 개칭했다. 소덕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광희문은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창의문은 군인의 출입문으로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이 문으로 도성에 들어왔다. 창의문은 사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조선시대 옛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도성인 서울 성곽의 4개의 작은 성문.
내용

동북의 홍화문(弘化門), 남서의 소덕문(昭德門), 동남의 광희문(光熙門), 서북의 창의문(彰義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1457년(세조 3)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1469년(예종 1) 폐문하였다.

홍화문은 혜화동에서 삼선동으로 뚫린 길 마루턱에 자리잡아 도성에서 함경도 등 북방과 직결되는 관문이었다.

1484년(성종 15) 창경궁이 완공되어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해 1511년(중종 6)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혜화문은 도성의 소문 가운데 하나였지만 대문의 구실을 하였다. 즉 경원가도(京元街道)가 여기서 연결되어 있었고, 북대문인 숙청문(肅淸門, 후에 肅靖門)이 항상 닫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행하였다. 그리고 여진(女眞)의 사신이 조공하기 위하여 주1에 입성할 때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처음 건립하였을 때의 주2는 언젠가 없어지고 1744년(영조 20) 어영청(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건축하였다. 이후 일제의 도시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문루는 1928년에 헐리고, 홍예와 석문마저 1939년에 사라진 것을 1994년 길 마루턱 북쪽에 복원하였다. 문루의 천장에는 대개 용을 그려 넣었는데, 혜화문에는 성 밖의 새 피해를 막기 위해 봉황을 그려 모셨다고 한다.

소덕문은 서소문동에서 의주로로 넘어가는 길 마루턱에 위치한다. 1472년(성종 3) 예종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시호를 피하여 소의문으로 개칭하였다. 이 문은 도성 안 백성들이 죽어서 도성 서쪽으로 운구할 때 이용되는 문이었다. 서소문 밖에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시전의 하나인 칠패(七牌) 시전(市廛)이 있어 발달하던 성업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1396년(태조 5) 건축 당시에는 다른 성문과 같이 문루가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지고 1743년(영조 19) 다시 문루를 건축하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철거되어 서소문동이라는 지명만 남아 있다.

광희문은 1396년 도성 축성 때 건축되었다. 문 이름은 ‘광명의 문’을 의미하나 개천 수구(水口)에 가까운 곳에 있어 수구문이라 불렀으며, 도성 안 장례 행렬이 동쪽 성 밖으로 나갈 때 통과하는 문이어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동대문남대문 사이의 중구 광희동에 있어 남소문이라 할 수 있으나 따로 도성에서 한강 나루터로 바로 통하는 문이 필요하게 되어 세조 때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 별도의 남소문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남소문 건립 후 주3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수지리적으로나 실용적으로나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12년 만에 폐문되었다.

조선 전기 왜국 사신들은 옥수동의 한강 두모포(豆毛浦)나루를 거쳐 광희문을 통하여 인현동에 있던 지정 숙소인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1915년경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만 남아 있었는데, 1975년 서울 성곽을 수축하면서 홍예 석축을 해체하여 남쪽으로 15m 이전 복원하면서 문루 12평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창의문은 ‘의로움을 표창한다’는 뜻으로,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도성을 축조할 때 함께 축조되었는데, 1413년(태종 13) 지리도참설에 따라 일시적으로 문이 닫히기도 했다. 그러나 1422년(세종 4) 숙청문과 함께 군인의 출입문으로 하였고, 궁궐의 담장 축조나 국가의 큰 공사가 있을 때 일시 열어 통행하였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의 반정군이 홍제원(弘濟院)에 집결하였다가 세검정을 거쳐 이 창의문을 열고 도성에 들어와 광해군을 쫓아냄으로써 인조 정권이 창출되었다. 1741년(영조 17) 성문과 문루를 개수하면서 인조반정의 반정공신 1등에서 3등까지의 공신 이름을 새긴 현판을 걸었으며,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창의문은 서울 성곽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완형을 지니고 있으며 지금도 성곽의 일부가 연결되어 있다. 창의문 구조의 특징으로, 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의 형상과 같아 그 기세를 제압하고자 지네와 상극인 닭의 모형을 나무로 만들어 추녀에 매달아 놓았다.

참고문헌

『태조실록』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비고』
『한경식략(漢京識略)』
『궁궐지(宮闕志)』
『서울특별시사』-고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63)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1987)
『서울성곽』(서울특별시, 1976)
『서울육백년』(김영상, 대학당, 1994)
주석
주1

‘서울’의 옛 이름. 우리말샘

주2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3

성종의 아버지, 德宗

집필자
나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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