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翼工式) 우진각지붕건물.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축조하면서 함께 세웠다. 이 때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이 설치되었는데, 소문 가운데 동문과 북문 사이에 위치하였으므로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나서면 수유현(지금의 수유리)을 거쳐 의정부·양주로 도로가 이어졌다. 당시 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혜화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으로 하였다가 1483년(성종 14)에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역시 홍화라고 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에 혜화로 고쳤다.
건물은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1684년(숙종 10)에 문루를 새로 지었다. 그 뒤 한말까지 동북 방면의 성문으로 보존되어오다가 1928년에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헐렸다. 지금은 문이 있던 위치만이 알려져 있고 문과 관련된 유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문의 모습은 아래쪽에 하나의 아치형의 출입구를 둔 돌로 쌓은 육축(陸築)이 있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소규모 성문의 형태를 취하였다.
육축에는 하부를 큰 장대석으로 받치고 그 위에 무사석(武砂石 : 대석의 일종으로 보통의 성을 쌓는 성석(城石)보다 훨씬 정밀하고 반듯하게 가공한 돌)을 불규칙하게 쌓아올렸으며 위쪽 좌우에 2개의 석루조(石漏槽 : 육축의 윗면 배수를 위해 성벽 상부에 설치한 석물)를 돌출시켰다. 그 상부에는 낮은 담을 쌓아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가퀴[城堞]를 두었다. 기둥 사이에는 판문(板門)을 달았다.
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칠하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를 올렸다. 천장에는 봉황을 그려 이 일대를 새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는 말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