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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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옛날 전통 사회의 성읍(城邑)이나 도시에 있던 상설 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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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시전은 조선시대, 옛날 전통 사회의 성읍(城邑)이나 도시에 있던 상설 점포이다. 유교 국가 도성의 필수 구성 요소로서 도성민의 생계유지, 궁궐과 관청에서 필요한 관수 물자의 조달, 대외 무역 참여 등의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각 도읍이나 주요 도시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은 건국 초부터 나라에서 시전 건설 사업을 추진하였고 조선 후기의 변화를 거쳐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도 존속하였다. 시전은 동업 조합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구성원들의 이권을 보호하는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정의
조선시대, 옛날 전통 사회의 성읍(城邑)이나 도시에 있던 상설 점포.
설치 목적

‘전(廛)’이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성읍 · 부족국가 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부터였다.

왕이나 지방관이 주재하던 곳에서 생겨난 도시들은 정치 · 사회 · 경제 등 모든 면에서 국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도시에 기반을 둔 도시 상업 기관들도 도시의 발달과 함께 성장, 발전해 갔다. 유교 국가에서 도성은 ‘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 즉 왕의 궁궐 앞에는 조정, 뒤에는 시전,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을 둔다는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다. 즉 시전은 도성의 4대 구성 요소 중 하나였다. 도성에 시전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농사를 짓지 않는 도성민의 생계유지, 궁궐과 관청에서 필요한 관수 물자의 조달, 대외 무역 참여 등의 목적 때문이었다.

변천 사항

(1) 삼국 및 통일신라

고구려는 수도인 평양성(平壤城)을 비롯해 국내성(國內城)한성(漢城) 등 이른바 3경제도(三京制度)를 가지고 있었고, 각각 상업 기관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백제에는 외관(外官) 10부(部) 중 도시부(都市部)라는 관청이 있었다. 여기서는 각 도시의 행정을 관장하는 한편, 시장의 설치 및 폐지 문제, 상품 판매 규정, 가격 조절, 시장 질서 유지, 상인들 사이의 분쟁 해결, 부정 거래 단속 등을 맡아보았다. 그러므로 백제의 도시에 상업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신라에서도 통일을 이루기 전부터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상업이 발달하였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제3 소지왕조에는 “소지왕 12년(490) 처음으로 서울에 ‘저자[市]’를 열어 각 지방의 상품을 유통시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저자란 상설적인 시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5세기 말엽에 설치된 경주 시내의 시전은 6세기 초엽에 들어서면서 설치 범위가 확대되어 509년(지증왕 10)에 동시(東市)가 설치되었고, 삼국통일 후 695년(효소왕 4)에는 서시(西市) 및 남시(南市) 등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동시 · 서시 · 남시에는 각각 시전(市典)이라는 기관을 두어 시전(市廛)들을 감독 · 관리하게 했는데, 주로 상인의 감독, 물가 조절, 도량형 감독, 상인들 사이의 분쟁 해결, 정부 수요품 조달 등의 업무를 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2) 고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시전의 건설이 본격화되었고, 개경의 도성 건설 사업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919년(태조 2) 개성에 수도를 정하고 수도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시설을 마련할 때, 시전 건물도 함께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시전 건물의 규모나 위치에 관해서는 기록이 별로 없다.

13세기경에 이르러 건국 초에 세워졌던 건물들이 다시 확대 건축되었다. 1208년(희종 4)에는 대시(大市)를 개축하였다. 이는 개성의 광화문(廣化門)에서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길의 좌우로 1,008개의 기둥이 있는 연립장랑(連立長廊)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건물을 일정한 넓이로 칸을 나눈 다음 상인들에게 빌려주어 장사를 하게 하고, 개성 시민들의 생필품이나 관부의 수요품을 조달하게 하였다. 상인들은 시전 건물을 빌려 쓰는 대신 정부에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의하면, 시전 건물의 높은 부분에 ‘영통(永通)’ · ‘광덕(廣德)’ · ‘통상(通商)’ 등의 상호(商號)를 적은 간판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시전의 보호, 감독 기관으로는 경시서(京市署)가 있어 물가 조절과 시전 감독을 담당하였다. 특히 상행위의 감독뿐만 아니라 상품의 종류에 대해서도 통제를 가해, 관에서 허락한 물품 이외에는 임의로 자유 매매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3) 조선 초 시전 건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부터 관부가 중심이 되어 다른 여러 가지 수도 건설 사업과 함께 시전 건설 계획을 세워 이를 실행에 옮겼다. 계획이 처음 세워진 것은 1399년(정종 1)이었다. 이때의 시전 건설 계획은 종로(鐘路)를 중심으로 혜정교(惠政橋)로부터 창덕궁 입구에 이르는 길 양편에 행랑시전(行廊市廛) 800여 칸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과 송도 천도 등의 정치적 분규로 인해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시전 건설은 한양에 천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즉, 1410년(태종 10) 2월 먼저 시전의 지역적 경계를 정해, 대시(大市)는 장통방(長通坊), 미곡과 잡물은 동부 연화동(蓮花洞) 입구 · 남부 훈도동(薰陶洞) · 서부 혜정교 · 북부 안국방(安國坊) · 중부 광통교(廣通橋), 소와 말 등은 장통방 하천 변에서 각각 매매하도록 하였다.

감독 기관으로서는 경시감(京市監)을 설치해 시내 상업 교역에 관한 물가 조절, 상세(商稅) 징수 등을 주관하게 하고, 별도로 청제감(淸齊監)을 설치해 시가의 청결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계획에 따라 1412년 2월부터는 시전의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전후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는 그해 2월부터 4월까지로 혜정교부터 창덕궁 입구에 이르는 양편 길에 800여 칸의 행랑이 완성되었다. 5월부터의 제2차 공사에서는 대궐문에서 정선방(貞善坊) 동구에까지 420여 칸의 행랑이 건조되었다. 제3차는 7월부터 다음 해인 1413년 5월까지로, 종루(鐘樓)로부터 서북쪽으로 경복궁까지와, 창덕궁으로부터 종묘 앞 누문까지, 그리고 숭례문 부근 등에 총 1,360여 칸이 완성되었다. 1414년 7월의 제4차 공사에서는 종루에서부터 남대문까지와 종묘에서부터 동대문까지의 길 양쪽에 시전 건물이 조성되었다. 정부는 새로 지은 시전 건물을 자신들이 지정한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공랑세(公廊稅)를 받았다. 『경국대전』에는 시전 상인들이 건물 1칸마다 봄 · 가을에 각각 저화(楮貨) 20장씩을 납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랑세 외에도 영업세 개념의 좌고세(坐賈稅)도 납부해야 했다.

시전의 주요 의무는 관청에서 요구하는 관수 물자를 제때 책임지고 조달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책판(責辦) 또는 진배(進排)라고 한다. 요구된 물품을 상납하면 그 대가를 받았으므로, 이것은 순수한 의무라기보다는 일종의 대정부 거래에 해당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라에서 대가 지불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때라도 시전은 물자 조달의 의무를 다해야 했으므로, 의무로 분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밖에 시전은 국가 장례, 산릉 조성, 관청 건물의 수리 · 도배 등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도 지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의무 부담에 대한 대가로 시전은 일정한 특권을 가졌다. 하나의 물종에 하나의 시전만 지정되었고, 시전 이외의 허가받지 않은 상업 활동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시전은 자연스레 자기 물종에 대한 독점적인 매매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4) 조선 후기 시전의 변화

조선 초에 편제된 시전 중심의 상업 질서는 머지않아 사상(私商)의 도전을 받게 된다. 16세기부터 시전으로 등록되지 않은 상인들의 활동이 왕성해지기 시작했고, 이들은 조선 후기 시전 질서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인식되며 ‘ 난전(亂廛)’으로 불리게 된다. 정부는 이러한 난전을 엄격히 금지하였고, 17세기 무렵에는 시전 상인들에게 직접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한, 즉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금난전권은 육의전에 대해서만 부여했으나, 나중에는 일반 시전에까지 확대되어 자유로운 상공업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한편, 17세기 후반 18세기 전반에는 시전의 수가 급증하였다. 정부는 현실적으로 이미 왕성한 난전의 활동을 단순히 금지하는 대신 이들을 시전으로 등록시키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지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늘어난 시전들이 저마다 금난전권을 남용하며 문제를 일으키자, 정부는 18세기 말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하여 육의전 이외 시전들의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최근 20~30년간 신설된 시전을 혁파하며, 시전이 아닌 상인들의 상거래를 허용해 주게 된다. 이로써 시전의 특권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시전도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시전은 도성 안에만 설치되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도성 밖에도 시전이 설립되었다. 또 국초 종로에 건설되었던 공설 행랑 이외에도 시전 건물을 증축하였던 흔적이 보인다. 『경성부사』에 그려진 조선 말기의 시전 배치도를 보면, 종로 대로변 시전 점포뿐만 아니라 피맛길 뒤편으로도 시전 건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된다.

시전은 탄탄한 조직력을 토대로 그 영업을 영위하였다. 시전 상인들은 같은 상품을 판매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일정한 동업자 조합을 이루어 자신들의 상권을 보호하였다. 시전은 조합 조직에 해당하는 도중(都中)을 두고 국역이나 대정부 거래, 구성원 간의 상호 부조, 자금 대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러한 도중의 비호 아래 각 구성원들은 개별적인 영업을 해 나갔다. 시전 건물도 개별 영업 공간인 방(房)들과 조합 사무소 또는 창고 역할을 하는 도가(都家)로 구성되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6대 시전, 즉 육의전(六矣廛)으로 꼽히는 면주전의 사례에 따르면, 시전 조합 조직은 간부진들의 조직인 대방(大房)과 일반 구성원들의 조직인 비방(裨房)으로 다시 나뉘었다. 대방에는 대행수(大行首)와 상공원(上公員) · 하공원(下公員)이, 비방에는 수석(首席)과 두 명의 소임(所任)이 각 조직의 대표자 3인이었다. 대방과 비방 아래에는 세부 업무별로 계(契) · 소(所) 등의 하부 조직을 두고 있었다. 시전 조합원의 자격과 가입 조건은 매우 엄격했고, 특히 혈연관계를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시전 조합의 조직력과 그에 대한 정부의 시전 보호책은 시전 상인들에게 분명한 방패막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시전은 조선 후기부터 이미 사상들에게 도전을 받고 있었고, 개항 이후부터 비롯된 외국 상품의 유입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촉진시켰다. 그 결과 시전의 방패막도 더 이상 의미를 잃게 되고, 상인들도 점차 시전을 떠나게 되었다. 구성원은 급격히 줄었으나 시전의 도중 조직은 20세기 초까지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고려도경(高麗圖經)』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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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 『조선시대 상인연구』(일조각, 1989)
박평식, 『조선전기상업사연구』(지식산업사, 1999)
변광석, 『조선후기 시전상인 연구』(혜안, 2001)
고동환, 『조선시대 시전상업 연구』(지식산업사, 2013)

논문

김미성, 『조선후기 면주전과 명주 생산·유통구조』(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김미성, 「19세기 말 면주전 접방(接房)의 감소와 도중(都中)의 대응」(『역사와 현실』 114,한국역사연구회, 2019)
김영호,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도시상업의 새로운 전개」(『한국사연구』 2, 한국사연구회, 1968)
유교성, 「이조시대 서울의 상업개관」(『향토서울』 6, 서울역사편찬원, 1959)
최완기, 「조선중기의 곡물거래와 그 유형-매출활동을 중심으로-」(『한국사연구』 76, 한국사연구회,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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