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社)는 토지신(土地神), 직(稷)은 곡신(穀神)을 상징한다. 옛부터 중국의 천자나 제후 또는 우리나라의 왕이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릴 때는 사직단(社稷壇)을 만들어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왔다.
국토 없는 나라는 있을 수 없으며 곡식없는 경제는 파탄한다. 또한 백성은 땅없이 하루도 살 수 없고, 곡식이 없으면 굶어죽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으며, 사직 또한 영토유지와 백성의 윤택한 삶을 기원하며 국민적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세워지는 것이므로 임금과 같은 존귀한 지위에 있어서도 백성과 사직의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직결되는 것으로 인식해 왔다.
따라서 사직은 천자나 제후가 되어 제사하는 제례로서 항상 국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논어(論語)』「선진 先進」편에 의하면, “백성이 있으면 사직이 있다.”고 했고, 『맹자(孟子)』「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편에서는, “무도한 제후가 나타나 만약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경우는 다시 새로운 어진 임금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백성이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고 임금은 여기에 비해 가벼운 존재이다.”고 한 것은 사직을 국가 자체로 간주한 표현이다.
『후한서(後漢書)』「제사지하(祭祀志下)」편에서는 “제후에게 사직이 있다면 나라가 있는 것이고, 사직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한편 『서경(書經)』「태갑상(太甲上)」편에서는 “선왕이 이 하늘의 밝은 명(命)을 돌아 보사 상하(上下)의 신기(神祗)를 받드시며, 사직과 종묘를 경건하고 엄숙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였다.
『예기(禮記)』「제의(祭儀)」편에서는 “나라의 신위(神位)를 세우되 우측에 사직을, 좌측에 종묘를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효경(孝經)』「제후장(諸侯章)」에 의하면, “능히 그 사직을 보전해 그 백성을 화합시켰다.”고 하여, 정치적 안정과 국민적 단결의 중요한 국가 체제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사’와 ‘직’의 결합과 관련해 『춘추좌전(春秋左傳)』「소공(昭公)」편에 의하면, 사에는 구룡(句龍)을 배사(配祀)하고 직에는 후직(后稷)을 배사하는 것이 관례이었으나, 하(夏)나라 이전에는 공공씨(共工氏)의 아들 구룡을 ‘사’라고 말했고, 열산시(烈山氏)의 아들 주(柱)를 직이라 했으며, 은(殷)나라 이후로 구룡과 후직을 함께 제사 지냈다.
또한 『예기』 교특생(校特牲)의 정현(鄭炫) 주(注)에 따라, “구룡 등을 지신(地神) 곡신(穀神)으로서 배사하게 되었다. 사직의 제사는 주대(周代)에 춘(春)·추(秋) 두 계절에 행하였다. 봄에 파종해 그것이 무사하게 성장이 잘 되기를 빌고, 가을에는 곡물이 자라나 많은 수확을 거두어 이를 감사하는 의례였다.
한(漢)나라 초기에는 ‘사’제례만을 자주 봉행하고, ‘직’제례의 경우는 자주 생략했는데,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때에는 대사직(大社稷)을 낙양(洛陽)에 세웠다. 그 후 사직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대사(大社: 公社)·제사(帝社)·대직(大稷) 등의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때 비로소 왕이 백성을 위해 대사를 세운 것으로 간주된다.
이 사제의 중요한 목적은 만백성을 왕궁에 이미 설치한 사직단에서 통할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종묘제사의 목적이 동족간의 결속을 다지는데 있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당(唐)나라 초기에는 매년 2월과 8월의 술일(戌日)에 대사와 대직을 제사지냈고, 겨울에는 연말을 기해 여러 신위에 대한 합동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날 사직을 사궁(社宮)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후 명(明)나라에 이르러 1393년(홍무 26)에 처음 그 의례를 정했으며, 1421년(영락 19)에 지금의 북경에 사직단이 완성되어 매년 2월과 8월의 술일(戌日)에 제사를 거행해 청(淸)나라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문헌기록상 신라 선덕왕(善德王)이 783년에 처음으로 사직단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고, 그 뒤 고려는 성종(成宗), 조선은 태조때 각각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고구려의 경우 고국양왕(故國壤王) 때 국사(國社)를 세웠다고 하는데, 여기서의 국사는 사직단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유사한 성격과 기능을 지녔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새로 건국하게 되면 그에 따라 새로운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므로 사직을 국가나 조정(朝廷) 자체로 인식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