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본이라는 말은 ≪서경≫ 하서(夏書)에 있는 ‘민유방본(民惟邦本)’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앞뒤의 문맥에서 보면, 그 내용은 “백성은 가까이 친애할 것이나 하대해서는 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면 나라가 안녕하다. ”는 것이다. 이는 우왕(禹王)의 훈계로서 그의 다섯 손자들이 나라를 잃고 한탄하며 부른 노래 속에 담겨 있다.
여기에 우왕의 나라에 대한 우환의식(憂患意識)과 백성에 대한 경외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는데, 우국경민(憂國敬民)의 정신이 ‘민본’의 직접적인 계기로서 촉발된 것이라 하겠다. 유교 경전 속에 나타난 민본의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분류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성이 나타난다.
첫째,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본이다. 이는 ≪서경≫의 주서(周書)에서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백성이 보고 듣는 그 자체이다.”라는 말과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는 말에 의거한다.
이는 천(天)과 민(民)의 일치를 의미하는데, 오히려 백성의 판단과 의사가 하늘의 판단과 의사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맹자(孟子)는 천자의 자리가 “하늘이 준 것이요, 백성이 준 것이다.”고 함으로써 백성이 모든 정치 행위의 주체임을 나타내었다.
둘째, 정치적 객체로서의 민본이다. 이는 백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서, 하늘이 백성을 낳고 왕을 세워 그로 하여금 통치를 대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정(仁政) · 덕치(德治) · 왕도(王道) 등의 용어에서 파악되는 위민사상(爲民思想)은 모두 백성을 정치적 대상으로 객체화한 내용들이다.
셋째, 국가 구성 요소로서의 민본이다. 맹자는 국가의 요소를 토지 · 인민 · 정사(政事)라 했고, 또한 백성과 국가와 군주 가운데 백성을 가장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고 군주를 가장 가볍게 평가하였다. 백성 없이 국가가 없고 정치적 목적 또한 실현되지 않는다.
이는 백성이 국가 구성의 기반이요 목적이며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맹자의 민귀군경설(民貴君輕說)은 민본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민본사상의 특성을 한마디로 말하면, 결국 민심(民心)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우리에게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의식이 잠재해 왔다. 그러므로 민심과 천심이 일치할 때 민본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유교의 정치사상에서 핵심이며 본질이 된다. 민본사상은 어디까지나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며(天人相與), 이념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선(善)에 이르도록 지향하고, 조직적으로는 천하를 통일된 대일가(大一家)로 체계화하려는 데 목적을 가진다.
이 때 하늘과 그 상대자인 백성의 화합, 즉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을 백성이 보고 듣는 것’으로 삼아, 결국 상하가 통달되는 천민합일의 새로운 매개자가 요구된다. 여기서 군주라는 새로운 개념이 도입된다. “군주는 하늘이 주는 자리요, 동시에 백성이 주는 자리이다.”고 맹자가 언명한 바와 같이, 하늘과 백성이 화합해 양자의 중간자로서 설정된 것이다.
이 군주에게 하늘을 대신해 천하를 다스리도록 천명이 내려지고, 그로 하여금 백성의 부모가 되게 하여 만민을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하늘 · 군주 · 백성은 통일된 한 집[家]의 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 바 ‘천하국가’이다. 이 양상은 원래 가정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천하국가로 발전되는데, 이 때는 온 누리가 크게 통합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이러한 세계의 이상적 모습이 평천하(平天下)의 세계이다.
그러나 만약 중간자인 군주가 민심과 천심을 거역하고 학정을 한다면, 하늘과 백성은 다시 화합, 그 자리(王位)를 빼앗고 다른 유덕자(有德者)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는 곧 민본사상에 입각한 혁명사상이다.
이와 같이, 민본사상은 그 정치적 행사가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는 사상이므로, 학문과 교육을 중시하는 교학정치(敎學政治)와 근본을 지키고 백성과 더불어 즐기려는 예악정치(禮樂政治)를 내포하는데, 이것은 왕도(王道)의 내용이기도 하다.
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잠재 의식은 통치에서 민심이 주체로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로부터 이제까지 대부분의 치자(治者)가 백성을 경외하며 민의를 수렴, 민생을 위해 각고(刻苦)한 것도 따지고 보면 백성이 근본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민심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민본적 토양은 고조선의 ‘홍익인간’의 이념과 ‘제세이화(濟世理化)’라는 단군왕검의 기본 입장에서도 어느 정도 엿보인다.
말하자면, 만민을 널리 유익하게 하며, 합리적 교화로 세상을 구제하려는 것으로, 여기에 위민 의식이 깃들어 있다고 하겠다. 이는 우리 민족의 근원적 국가 이념이기도 하였다.
≪조선사략 朝鮮史略≫ 단조기(檀朝紀)에는 “나랏 사람들이 신인(神人)을 왕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단(檀)이라 정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나랏 사람들이 왕을 추대했다는 표현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본보기요 선구적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민본사상의 근원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고대 부족국가로부터 차차 국가형태가 확대, 발전되면서 신라가 민주적 화백제도(和白制度)를 운영하거나, 고구려가 태학(太學)을 세우고 국가의 인재들을 양성하며 유학을 경세제민(經世濟民)의 근본 원리로 수용한 것도 민본사상의 기틀을 다진 것이라 할 것이다.
물론, 그 뒤 최고 학부로서 통일신라의 국학(國學), 고려의 국자감(國子監), 조선의 성균관(成均館) 등의 국립대학을 통해 문화를 체계화, 이론화하며 백성을 교화한 것도 모두 국가 발전과 중민(重民) · 애민 의식에 입각한 국책이었던 것이다.
특히, 조선의 세종은 예악 정치를 실현하고자 <여민락 與民樂>이라는 노래를 제작, 백성과 더불어 함께 즐기고자 했으며, 훈민정음을 반포해 백성들을 일깨우고자 했다는 점에서 위민 의식이 충만한 민본사상의 실천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 역사 속에는 민본사상에 의한 정치적 이론과 실천이 그 축을 이루며 면면히 이어와 민족적 기반이 되었다. 그것은 민생에 관한 논의요, 민심에 따른 논리이며, 위민의 정치 행사인 것이었다.
유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에서, 그 정명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민본사상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민본사상에 입각하여 통치한 시대는 평화가, 민본사상을 잊고 힘으로 지배한 시대는 혼란이 있었다.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학자 이황(李滉) · 이이(李珥) · 조헌(趙憲) · 정약용(丁若鏞)의 민본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황
이황의 정치사상은 주로 왕도정치에 기반을 둔 성학(聖學)과 제왕지학(帝王之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황의 민본사상도 성학에 근거해 다음의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무진육조소 戊辰六條疏>에 나타난 천민합일사상으로 천인의 향합(響合)이 왕의 대통(大統)을 계승하는 근거임을 밝힌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학십도 聖學十圖≫의 서문에서 강조한 경민사상(敬民思想)으로서, 경을 마음의 주재자로 보고 성학이 시종일관 이루어질 수 있는 까닭임을 설명한 것이다.
양자는 모두 성학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우려는 이황의 이상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지만, 이는 유교에 나타난 이제삼왕(二帝三王)의 방법을 모범으로 삼으려는 의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천인향합(天人響合)으로 하늘과 백성이 일치된 상태를 가지고 왕에 대한 신임을 내림으로써 하늘 · 왕 · 백성의 삼자가 합일된다는 민본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우왕의 우국경민(憂國敬民)의 정신과 같이 왕의 경(敬)이 성학 · 제왕지학의 시종일관한 요체가 된다고 함으로써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중민 · 애민 사상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 이이
이이는 <옥당진시폐소 玉堂陳時弊疏>에서 ≪서경≫의 민유방본을 인용해 “옛날 성왕은 반드시 백성들의 귀와 눈을 자신의 귀와 눈으로 삼아 민의를 모두 파악하였다. 그리고 신하는 그 직책에 따라 옳고 바른 것을 진술하게 하고, 상인들까지 시장이나 노상에서 비판하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간관(諫官)이었다.”고 하여 민본사상을 표출하였다.
그의 민본사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한다면 공론(公論)과 양민(養民)과 혁구경신(革舊更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그에게 공론은 나라의 원기(元氣)였다. 그리고 그 소재는 국시(國是)에 있으며, 발하는 모든 것은 백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론은 막을 수 없고, 다만 일반적 정세에 따라 국시, 즉 국가 이념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론이 막혀 민심이 흉흉해 뒤끓는 듯하다면 곧 붕괴될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이이에 의하면, 공론은 민심에 의해 백성이 모두 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함이요, 다툴 필요없이 백성이 모두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말함이니 곧 국시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공론이 조정에 모아질 때 나라는 잘 다스려지지만, 만약 항간에 흩어져 있다면 나라는 어지러워질 것이며, 양쪽에도 없다면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로(言路)가 열리고 닫힘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다고 했으니 역시 민본사상의 핵심을 설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양민 즉 민생에 관한 문제이다. 이이는 정치적 질서의 확립은 양민한 연후라야 가르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의 정치적 사고가 정치현실의 구체적 상황을 문제시하고 거기에서 얻어지는 상황 인식(양병설 등)을 기초로 하여 구축한 하나의 정치원리인 것이다.
이는 공자(孔子)의 이른바 “넉넉히 하면서 가르친다.”는 말이나, 맹자의 항심(恒心)에 앞서 항산(恒産)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 민생 문제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셋째는, ‘혁구경신’이다. 이는 모든 제도에서 옳고 그름과 이로움과 해로움을 헤아려 개혁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이는 여기서 시비와 이해의 기준은 백성의 안정이 있을 따름이라 함으로써 민본사상에 입각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이의 입장과 태도는 오로지 민생안정과 민의창달에 역점을 둔 것이며, 이러한 사상이야말로 민본사상의 본질적 내용이 아닐 수 없다.
(3) 조헌
조헌은 이이의 혁구경신의 정신을 계승한 개혁주의자였으며, 애국사상을 이어 끝내 순국한 애국주의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1573년(선조 6)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국가의 발전을 위해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썼는데, 이이와 같이 민생의 구제를 급선무로 인식하였다.
<동환봉사>에서는 자신의 실학적 성격의 개혁주의와 민생구제를 위한 민본사상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이 글의 내용은 시폐(時弊)를 없애고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과, 군왕의 사사로운 욕심을 막는 성의(誠意)를 전제한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 두 전제는 모두 유가의 민본사상에 근거함은 물론이다.
조헌은 당시의 습속이 오로지 향락에만 빠져, 위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의 헐벗고 굶주림을 구제하기는커녕 낭비를 일삼아 나라의 근본을 한없이 위태롭게 한다고 하여, 관리의 부패와 태만을 비판하였다.
조헌은 이 모든 것이 민폐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이를 제거하려는 개혁의지를 드러내었다. 또한 이러한 나라의 병폐가 제거되고 민폐가 없어져 백성들이 다시 소생하도록 하기 위해 임금의 사사로운 뜻을 막아 공의(公義)로써 바로잡는 ‘축군지욕(畜君之欲)’의 성의를 강조하였다.
임진왜란 때 장렬히 전사한 조헌은 그 자체가 곧 공의의 실천이었다. 주로 이이의 사상을 이어받은 그가 민생 문제를 심각한 관심으로 민폐제거를 위해 쏟은 개혁주의와 공의 · 공리겸합(公利兼合)의 민본사상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4) 정약용
우리 민족에서 근대 민본사상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학자는 정약용일 것이다. 대부분의 유학자들의 정치이론이 위민적 경향에 기울어져 있는 데 반해, 정약용은 백성을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파악한 특징적 인물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민관념(民觀念)의 획기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은 통치자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 백성이 통치자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태초에는 백성뿐이었으나 백성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통치자를 추존(推尊)한 것이라고 역설해 백성의 본래성과 근원성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통치자는 본래 백성으로부터 추대된 존재라는 민본 논리를 개진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옛날에는 정치가 아래(民)에서 위(治者)로 향했으나 당시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치란 올바른 것’이라는 공자의 정명사상(正名思想)을 계승, 우리 백성들을 조화롭게 할 것(均吾民)을 되뇌면서, 부 · 토지 · 혜택 등의 분배에서 백성에 대한 평등성과 배분적 정의를 논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정치가 퇴폐하면 백성은 곤궁해지고 나라 또한 가난해지며 세금이 가혹해져, 결국 민심은 이탈하고 천명(天命)이 떠나버린다면서 정치의 급선무가 민본에 있음을 적극적인 원리로써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