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민’이란 원래 ‘사(士)·농(農)·공(工)·상’(商)이라는 4가지의 사회적 계층을 가리키는 말로 동양의 전통적 왕조사회에서 백성들의 직업을 4개의 직업 계층으로 분류하해 나라의 산업 정책을 수립해 백성들의 삶을 도모해 온 제도의 일종이다.
≪서경 書經≫<주관 周官>편, ≪춘추 春秋≫<곡양전 穀梁傳>, ≪국어 國語≫<제어 齊語>편 등에 처음 보인다.
≪서경≫<주관>편에 의하면, “사공(司空=산업장관)은 나라의 토지를 관리하나니, 사민이 일정한 곳에 정착해 제 직업과 제 구실을 다하며 때를 맞추어 토지를 적절히 이용하나니라.”했는데, ≪서경≫을 주석한 채침(蔡沈)은 사민을 사·농·공·상의 4계층으로 분류하였다.
≪춘추≫<곡양전>에는 “옛날에 사민이 있었는데 사민·상민·농민·공민이 있었다.”고 하였다. ≪한서≫<식화지>에서는 “학문으로서 지위에 있는 사람을 ‘사’라 하고, 흙을 개간하여 곡식을 재배하는 사람을 ‘농’이라 하고, 기술을 통해 기구를 만드는 사람을 ‘공’이라 하고, 재물을 통해 돈벌이하는 사람을 ‘상’이라 한다.”고 하였다.
결국 사민은 모든 사람을 사·농·공·상이라는 네 가지 직업형태로 구분한 옛날 주나라의 사회 구성체계임을 말해 준다.
한편, ≪국어≫<제어>편에서는 “사민을 잡되게 근무시키지 말아야”한다고 전제하고, “옛날 성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사’는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임하게 했고, ‘농’은 농부로써 논밭에 나가 농토를 일구게 하고, ‘공’은 공인으로써 관청에서 근무(在官)하게 하고, ‘상’은 상인으로써 시장에 자리잡고 살아가게 하였다.”고 했는데, 역시 네 가지 직업 계층으로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동양의 왕조시대에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임금에 상대되는 개념으로서의 ‘민’(民)·‘인민’(人民) 또는 ‘백성’(百姓)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에 비해 ‘사’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의미상 변화가 많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사는 원래 주대(周代)의 왕(王)·공(公)·경(卿)·대부(大夫)·사(士)의 오복제도(五服制度) 가운데 하나인 벼슬의 지위를 나타내는 말이었으나, 학덕을 쌓아가는 선비를 뜻하기도 했고, 후대로 내려와서는 군대의 병사를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민에서 말하는 ‘사’는 앞서 ≪국어≫에서 표현된 청정한 선비 계층으로 부모가 되어서는 의를 말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말하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공경을 말하며, 어른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는 어른을 공손히 대해 올바름을 지향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의 존재는 점차 왕조시대가 낳은 신분 사회에서 백성의 상위에 군림하는 지배 계층으로 인식되었다. 자연히 사를 제외한 백성을 주로 농·공·상의 3계층으로 풀이하게 되었다.
다만 사민 가운데 ‘공민’에 대해서는 ≪춘추≫<곡양전>·≪한서식화지≫에 표현된 ‘공’과 ≪국어≫<제어>편에 보이는 ‘공’에 대한 견해가 다소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앞서의 ≪춘추≫·≪한서식화지≫·≪서경≫의 주석에는 ‘공’이 주로 기술을 통해 기구를 만드는 공업 계층으로 설명되어진 데 반해, ≪국어≫에서는 관청에 나가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계층으로 표현되어 있어 다소 혼돈스럽지만, 점차 기술을 통해 도구나 기구를 제작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일반적으로도 일선에서 공업 분야에 종사하는 직업 계층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사민론은 전통적 왕조사회의 사민이라는 사·농·공·상의 직업 체계를 차별적 사회의 신분 질서로 규정하고, 일대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회 개혁론으로 일컬어 진다.
이러한 이론은 조선왕조 사회의 폐단을 신랄히 비판, 사민평등론(四民平等論)의 주장과 함께 사회적 신분 질서의 개혁을 요구하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주창된 이론이다.
이를테면 정약용(丁若鏞)은 그의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전론 田論>편에서 고대 중국의 정전제(井田制)나 여타 실학자들이 제기한 균전제(均田制)등에 반론을 제기하며 새로운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주장하였다.
또한 <농책 農策>편에서는 “선비들이 놀고 먹기 때문에 나라의 경제(利) 전반이 개발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을 제기하고, 선비는 국정에 참여하다가 벼슬로서의 직책을 다할 수 없을 때에는 마땅히 농·공·상등의 산업 활동에 종사해 자신의 생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제가(朴齊家)는 ≪북학의 北學議≫<외편>에서 농업기술의 개량과 국내 상업 또는 외국 무역의 이점을 설파하였다.
<시정 市井>편에서는 먼저 사회적 분업의 실시를 강조하고, 사·농·공·상 가운데 상업의 우위를 강조, 상업이 발달하려면 교통수단과 교통 기관의 개선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존주론 尊周論>편에서는 일없이 놀고 먹는 자는 나라의 큰 도둑이라고 한가로이 소일하는 양반 계층을 비판하며, 선비의 상계(商界) 진출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제시, 상공업 활성화와 그 윤리성을 강조하였다.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 擇里志≫<사민총론 四民總論>편에서 “인간은 땅에서 났다.”고 전제하고, 인간과 자연의 상관 관계를 논함과 더불어 사민의 발생 원인이 사회적 환경에서 기인한 것으로 분석한 후 본질적으로 ‘사민은 평등’하다고 주장해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비판하였다.
유수원(柳壽垣)도 ≪우서 迂書≫<논문벌지폐 論文閥之弊>편에서 상인에 대한 금고형(禁錮刑)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아울러 “사·농·공·상은 다 같은 사민이다.”고 하여 사민평등(四民平等)은 물론 능력과 자질에 따른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이 보장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고정화된 사회적 신분 계층으로 취급한 전통적 관념을 비판 배격하고, 사민을 직업적 분화 계층으로 분리·간주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질서 체계에 입각한 국민 경제의 발전과 사회 풍속의 순화를 주장하는 진보적 이론을 전개함으로써 근대 국민주의사상·근대 민주국가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