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던 시전 상인의 건물은 사무실인 도가(都家)와 판매처인 행랑(行廊)으로 구성되었다. 행랑은 공랑(公廊)으로도 불렀는데, 17세기 이전까지 조정에서는 행랑을 기준으로 세금을 징수하였다. 한편 시전의 사무실에 해당하는 도가는 도중(都中)이라는 시전 조직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특정 시전에 소속된 상인은 도원(都員)으로 불렀으며 도중이라는 조직을 운영하였다. 도중은 간부 모임인 대방(大房)과 일반 조합원 모임인 비방(裨房)으로 구분되었다. 대방의 최고 지위자는 영위(領位)였지만 일종의 명예직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대행수(大行首) 직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 도중 조직을 이끌었다. 대행수직은 투표로 선출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대체로 임기는 2개월이었지만 시전마다 사정이 달라 3개월이나 6개월동안 직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도중이 사무실로 사용하는 공간이 도가였다. 시전마다 판매하는 물종과 규모가 달랐기 때문에 도가의 규모나 모습도 제각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산 마포(麻布)를 판매하였던 포전(布廛)의 도가는 1층 목조 기와집으로 약 65평(1평=3.3058㎡)정도 되었다고 하는 한편, 1884년에 모리스 쿠랑이 지은 『 한국서지(韓國書誌)』의 서론에 나오는 시전의 도가는 2층으로 묘사된다.
도가는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로도 사용되었는데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며 서울 시전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입전(立廛)은 도가접주인(都家接主人)을 두어 도가를 지키게 하는 한편 도난이 발생했을 때 도가접주인이 배상하도록 하였다. 포전의 경우도 밤마다 도원들이 돌아가면서 도가를 지켰던 사실이 확인된다.
한편 상품 거래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졌던 행랑은 여러 개의 칸으로 구성된다. 소소한 시전은 2030여 칸으로, 육의전(六矣廛)에 해당하는 서울 내 주요 시전은 100여 칸으로 이루어졌다. 행랑 1칸은 다시 610개의 방(房)으로 구분되었고, 1개 방은 1평 남짓의 공간이었다. 이와 같이 판매 공간인 행랑과 사무 공간인 도가가 시전을 구성하였고, 특히 도가는 시전을 운영하는 도중 조직이 업무를 보았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