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환관들이 채소 등을 경작하던 관서로, 정확히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연산군 대이다. 1504년(연산군 10) 윤4월 27일에 연산군은 무관의 사열식이 이루어졌던 살곶이[전곶(箭串)]를 내농포에 소속시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할 것을 전교하였다. 군대의 사열장을 왕실의 채소밭으로 전환한 것인데, 이 기사를 통해 16세기부터 내농포가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농포는 왕실에 채소나 과일 등을 납부하였던 만큼 공상(供上) 아문(衙門)으로 분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곡초, 생초 등의 공물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선혜청(宣惠廳)에서 공가를 지급받았다.
『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선혜청에서 내농포에 쌀 877여 석(石, 1석=약 180ℓ)을 공가로 지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내농포에는 각종 면세 및 교통의 혜택이 주어졌다. 내농포 소속 전답 71결 2부 1속이 면세되었으며, 말은 20필이 제공되었다. 이와 같이 왕실 공상품을 조달하는 아문인 내농포는 선혜청에서 공가를 지급받아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한편 면세 결과 마필을 제공받는 등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 속대전(續大典)』에서는 내농포가 4척의 배를 보유할 것과 1척당 선세(船稅) 40문(文)씩을 감면해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균역법(均役法) 이후에는 궁가와 아문의 배가 모두 균역청(均役廳)에 소속됨에 따라 임대해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내농포의 위치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밖 동쪽 거리이다. 『만기요람』에 어영청(御營廳)의 입직군이 내농포부터 돈화문 동쪽까지 지켰다는 기록에서 내농포가 돈화문 동쪽 인근에 있었던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본래 도성 안에서는 농경이 금지되었지만 내농포의 미나리밭[근전(芹田)]은 예외로 두어 경작을 허락하였다. 한편 비교적 최근 연구에서는 내농포가 창경궁 후원에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