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농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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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환관들이 왕실에 필요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던 관서.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16세기
내용 요약

내농포는 조선시대에 환관들이 왕실에 필요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였던 관서이다. 본래 도성 안에서 경작이 금지되었으나 내농포는 도성 안에 있으면서 왕실에 필요한 공상품을 조달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안정적으로 공상물을 진배하기 위하여 선혜청에서 공물가를 지급받는 한편 면세결, 마필 등을 제공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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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환관들이 왕실에 필요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하던 관서.
내용 및 변천사항

조선시대에 환관들이 채소 등을 경작하던 관서로, 정확히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연산군 대이다. 1504년(연산군 10) 윤4월 27일에 연산군은 무관의 사열식이 이루어졌던 살곶이[전곶(箭串)][^1]를 내농포에 소속시켜 채소와 과일을 재배할 것을 주2하였다. 군대의 사열장을 왕실의 채소밭으로 전환한 것인데, 이 기사를 통해 16세기부터 내농포가 운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농포는 왕실에 채소나 과일 등을 납부하였던 만큼 주3 주4으로 분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곡초, 생초 등의 공물을 부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선혜청(宣惠廳)에서 주5를 지급받았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선혜청에서 내농포에 쌀 877여 석(石, 1석=약 주6을 공가로 지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내농포에는 각종 면세 및 교통의 혜택이 주어졌다. 내농포 소속 전답 71결 2부 1속이 면세되었으며, 말은 20필이 제공되었다. 이와 같이 왕실 공상품을 조달하는 아문인 내농포는 선혜청에서 공가를 지급받아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한편 면세 결과 마필을 제공받는 등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 속대전(續大典)』에서는 내농포가 4척의 배를 보유할 것과 1척당 주7 주8씩을 감면해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균역법(均役法) 이후에는 주9와 아문의 배가 모두 균역청(均役廳)에 소속됨에 따라 임대해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내농포의 위치는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밖 동쪽 거리이다. 『만기요람』에 어영청(御營廳)의 입직군이 내농포부터 돈화문 동쪽까지 지켰다는 기록에서 내농포가 돈화문 동쪽 인근에 있었던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본래 도성 안에서는 농경이 금지되었지만 내농포의 미나리밭[근전(芹田)]은 예외로 두어 경작을 허락하였다. 한편 비교적 최근 연구에서는 내농포가 창경궁 후원에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만기요람(萬機要覽)』
『속대전(續大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논문

최주희, 「조선후기 선혜청의 운영과 중앙재정구조의 변화: 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 과정을 중심으로」(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정우진, 심우경, 「조선시대 궁궐 후원 농경지 조영의 특성」(『한국조경학회지』 40-4, 한국조경학회, 2012)
주석
주1

서울특별시 성동구 중랑천 하류에 있는 조선 시대의 다리. 세종 2년(1420)에 공사가 시작된 후 중단되었다가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 조선 전기의 다리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보물 정식 명칭은 ‘서울 살곶이 다리’이다.    우리말샘

주2

임금이 명령을 내림. 또는 그 명령.    우리말샘

주3

물건 따위를 상급 관청이나 궁중, 또는 임금에게 바치던 일.    우리말샘

주4

관원들이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 사무를 보는 곳을 통틀어 이르는 말.    바로가기

주5

예전에 나라에 바치던 공물의 값.    우리말샘

주6

부피의 단위. 곡식, 가루, 액체 따위의 부피를 잴 때 쓴다. 한 석은 한 말의 열 배로 약 180리터에 해당한다.    우리말샘

주7

배를 부리는 사람에게 물리던 세금. 옛 지방세의 하나로 재산세에 포함되었다.    우리말샘

주8

조선 시대의 화폐 단위. 1문은 1푼에 해당하였다.    바로가기

주9

조선 시대에, 왕실의 일부인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하여 독립한 대원군ㆍ왕자군ㆍ공주ㆍ옹주가 살던 집을 통틀어 이르던 말.    우리말샘

집필자
최주희(덕성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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