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앙의 각 아문은 지방 군현에서 공물(貢物)을 조달받음으로써 필요한 물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앙 아문이 공물을 조달받는 방식은 17세기 대동법(大同法) 실시를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지방 군현에 부과되었던 각종 공물 가운데 하나인 종이류 역시 17세기를 기점으로 상납 방식이 변화하였다.
종이는 국가의 문서 행정에 없어서는 안될 물품이었다. 특히 품질 좋은 종이는 방물, 세폐 물종으로 사신 행차 때 청나라 황실에까지 보내졌다. 조선 전기에는 도성의 지전(紙廛)을 통해 종이를 조달하는 한편, 각읍에 설치된 지소(紙所)에서 지장(紙匠)이 제작한 종이를 수취하는 방식을 활용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지방에서 공물로 바치는 종이는 공인(貢人)이 조달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처음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을 때 정부에서는 양호의 대동세를 받아 지전에 값을 주고 종이를 조달하고자 하였다. 이에 백면지(白綿紙) 1권당 미곡(米穀) 4두로 계산하여 지전에 진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지전에서 값이 적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백면지 납부는 지계(紙契)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백면지 1권당 미곡 5두씩을 지급하였다.
이후 경상도 대동법이 실시될 때 지전도 백면지를 조달하게 되어 종이 공납은 지전과 지계가 분담하게 되었다. 『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지계는 쌀 4,846여 석, 지전은 2,423여 석을 받고 대호지(大好紙), 소호지(小好紙), 방물백면지(方物白綿紙) 등을 마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종이를 나라에 바쳤던 공인들은 주로 사찰에서 제작하는 종이를 구매하여 조달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공인이 사찰에 지급하는 가격이 시중가격과 달라 사찰의 승도들이 피해를 입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지계에서 중앙 아문에 종이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어려워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물의 미납액이 늘어나 결국 1862년(철종 13) 무렵 지계가 혁파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종이 조달은 지전에서 주로 담당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