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면지(白綿紙)는 조선 후기 이후부터 사용하였던 종이의 명칭이다. 정조(正祖)의 일기 『일성록(日省錄)』(1777년 10월 24일)에 따르면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정민시(鄭民始)가 방물로 거둬들이는 백면지 중 품질이 떨어지는 종이가 섞여 있다고 정조에게 보고하자, 정조가 백면지를 세심하게 가려 봉과(封裹)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백면지를 지칭하는 용어로 정민시는 백면지(白面紙)라 하고 정조는 백면지(白綿紙)라고 한 것을 보면 둘 다 같이 통용되던 동일한 용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사물을 각 항목별로 정리한 『광재물보(廣才物譜)』에 의하면, 백추지(白硾紙)는 백면지(白面紙)이며 고려에서 난다고 기록된 바 있으며, 『양매시화(楊梅詩話)』에는 백추지는 매끄럽고 하얀 종이이며, 매우 견고하고 지면이 매끄럽다고 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백면지는 견고하고 질기며 종이 표면이 매끄럽고 하얀 종이였음을 알 수 있다.
백면지의 생산지는 전라도 등지와 충청도 충주목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충주목 특산품 중의 하나로 백면지를 기록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는 백면지가 전라도 백성들의 요역으로 무겁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백면지는 우리나라 왕실 및 관청과 중국에 정기적으로 납입되었다. 평소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상용지(常用紙)가 아니었고 보통 이상의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특히 예폐(禮幣)와 부의지(賻儀紙)로 중국에 보내졌으며, 이러한 용도로 사용된 것이 전체 생산량 중 가장 많은 비율을 보였다. 황제의 생일인 성절(聖節)의 하례 방물(方物), 금나라에 보내는 예폐 · 세폐에 반드시 포함된 물품이었다. 중국으로 보내졌던 용도 이외에도 1년에 2번 어전, 왕비전, 대비전 등에도 백면지가 사용되었으며, 세자궁이 강독 후 상격(賞格)으로 내리는 지물(紙物)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왕실과 각 관청에서도 의궤 제작 및 각 문서류 작성 등의 용도로 백면지가 사용되었으며, 『경세유표(經世遺表)』에 시권(試券)의 종이를 백면지를 사용하였다는 내용이 있어 한때 과거시험용 종이로도 백면지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