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재축(賡載軸)』은 임금이 지은 시가(詩歌)에 신하들이 화답한 갱재시(賡載詩)들을 모아 필사 또는 간행한 책이다. 갱재시는 고대에 순(舜) 임금이 지은 노래에 신하 고요(皐陶)가 노래를 주고받은 갱재가(賡載歌)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조(正祖)의 시에 신하들이 화답한 시들을 모아 필사본 또는 간인본으로 제작한 『갱재축』이 다수 제작되어 현존본이 상당수 남아 있다.
『갱재축(賡載軸)』은 ‘갱재시축(賡載詩軸)’의 줄인 말로, 임금이 지은 시가(詩歌)에 신하들이 화답한 갱재시(賡載詩)들을 모아 필사 또는 간행한 책을 말한다. 갱재시는 고대에 순(舜) 임금이 지은 노래에 신하 고요(皐陶)가 노래를 주고받은 갱재가(賡載歌)에서 비롯되었다.
‘갱(賡)’은 ‘잇는다[續]’는 뜻이고 ‘재(載)’는 ‘완성한다[成]’는 뜻으로, 갱재(賡載)는 서로 이어서 노래를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갱재시는 타인이 지은 시의 원운(原韻)이나 제의(題意)를 따라서 화답하는 시를 말하며, 주로 임금의 말이나 노래에 신하가 화답하는 것을 뜻한다. 갱재시는 『서경(書經)』 우서(虞書)의 「익직(益稷)」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중국 고대의 순(舜) 임금이 “신하가 기쁘게 일하면 임금의 정치가 흥기되어 온갖 일이 확장될 것이다.”라고 하자, 신하인 고요(皐陶)가 “임금이 세세히 따지고 자질구레하면 신하들이 게을러져서 만사가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순임금과 고요가 서로 권면하며 주고 받은 노래가 그 시원을 이룬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정조가 신하들과 갱재시를 짓고 다수의 『갱재축』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내용은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82권 「갱재축(賡載軸)」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정조가 연사(燕射), 시예(試藝), 상화(賞花), 조어(釣魚)에서부터 경사가 있을 때나 출행 중에 잠시 머물러 쉴 때에도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하게 하여 다수의 『갱재축』을 만들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정조와 신하들이 지어 만든 그동안의 『갱재축』을 연도순으로 편집하고 정리자(整理字)로 인쇄하여 『갱재축』이란 책명으로 반포하였는데 그 서목(書目)이 48권이나 될 정도로 방대했다. 그 내용은 1781년(정조 5)에 정조가 신하들과 함께 폭포를 구경하고 소요정(逍遙亭)에서 거문고 연주를 들으면서 벽에 새겨진 시에 차운(次韻)하고 화답한 『소요정갱재축(逍遙亭賡載軸)』으로부터 1800년(정조 24)에 정조가 북원(北苑)에서 하룻밤 묵을 때 『후산집(后山集)』에서 뽑은 시에 차운하고 화답한 『북원재일갱재축(北苑齋日賡載軸)』 등 다양한 일시와 장소 및 참석 인원이 함께 표기되어 있어 『갱재축』을 작성할 당시의 배경과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