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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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 / 정리자
원행을묘정리의궤 / 정리자
출판
개념
1796년에 주자소에서 생생자(生生字)를 자본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정리자는 1796년에 주자소에서 생생자(生生字)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이다. 1795년 『정리의궤』 및 『원행정례』 등의 책을 인출하기 위해 주조에 착수하여 다음 해 3월에 중첩자까지 주성했다. 규장각 이만수와 윤행임에게 감독하게 하고, 생생자를 자본으로 대자 16만 자, 소자 14만여 자를 주성했다. 활자는 균제·방정해 인쇄하는 데 종이가 찢어지거나 활자가 옆으로 기울고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이 활자는 주자소에서 도록(都錄)을 만들고 전수원(典守員)을 두어 간직했다. 1857년 빈전도감의 화재로 대자 16만 자와 소자 14만 자가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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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796년에 주자소에서 생생자(生生字)를 자본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
내용

『정리의궤(整理儀軌)』 및 『원행정례(園行定例)』 등의 책을 인출하기 위하여 1795년 주조에 착수하여 다음해 3월에 중첩자까지 완전하게 주성한 것이다.

규장각 직제학 이만수(李晩秀)와 규장각 원임직각 윤행임(尹行恁)에게 감독하게 하고, 생생자(生生字)를 자본(字本)으로 대자(大字) 16만 자, 소자(小字) 14만여 자를 주성하여 규영신부(奎瀛新府)에 간직하였는데, 이를 정리자라 한다.

1858년(철종 9)에 개주된 활자와 구별하기 위한 경우는 초주정리자(初鑄整理字)라 하며, 그 해의 간지를 따서 일명 ‘을묘자(乙卯字)’라고도 일컫는다.

정리자의 자형은 그 자본이 된 생생자와 아주 똑같다. 이 활자의 자체는 균제 · 방정하고, 각주(刻鑄)가 정교하여 위부인자(衛夫人字)와 한구자(韓構字) 등에 비하여 인쇄하는 데 종이가 찢어지거나 활자가 옆으로 기울고 흔들리는 일이 없었다.

또, 인쇄도 간편하여 비용과 노력이 덜 들고, 인쇄상태는 중국의 수진본(袖珍本)보다도 오히려 선명하였다. 다만, 그 자체의 규각(圭角)이 너무 드러나서 원후(圓厚)한 맛이 없는 것이 흠일 뿐이었다.

이 초주정리자로 찍어낸 인본으로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초인본(初印本)을 비롯하여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1796) ·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1797) · 『두율분운(杜律分韻)』(1798) · 『육률분운(陸律分韻)』(1798) · 『태학은배시집(太學恩杯詩集)』(1798) · 『홍재전서(弘齋全書)』(1814) · 『진찬의궤(進饌儀軌)』(1829) · 『계원필경(桂苑筆耕)』(1834), 『유중외대소민인등척사윤음(諭中外大小民人等斥邪綸音)』(1840) 등이 알려지고 있다.

이 활자는 주자소(鑄字所)에서 도록(都錄)을 만들고 전수원(典守員)을 두어 소중히 간직하였으나, 1857년 10월 15일 밤에 빈전도감(殯殿都監)의 화재로 주자소에 저장되었던 다른 활자와 함께 대자 16만 자와 소자 14만 자가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58년에 규장각 검교제학 김병기(金炳冀), 규장각 제학 윤정현(尹定鉉) · 김병국(金炳國) 등에게 명하여 정리자 대자 8만 9203자와 소자 3만 9416자를 새로 주조하고, 전년도에 불타고 남은 활자 17만 5698자와 함께 주자소에 간직하게 하였는데, 이를 재주정리자(再鑄整理字)라 일컫는다.

이 재주활자에 대하여 당시 관계관이었던 정원용(鄭元容)의 기록에 따르면, 주조는 1858년 가을부터 시작하여 9월 15일에 끝마쳤는데, 이 기간 중의 활자판에 대한 사실은 정리대자의 경우 불타고 남은 활자가 6만 3939자이고 새로 주조한 활자가 8만 9449자로서 도합 15만 3388자였으며, 정리소자는 불타고 남은 활자가 5만 9307자, 새로 주조한 활자가 3만 9417자로서 도합 9만 8724자였다.

따라서 실록의 기록과 정원용의 『수향편(袖香編)』 주자신주조(鑄字新鑄條)의 기록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즉, 신주한 활자 중에서 대자 246자, 소자 1자의 차이가 나는 것은 혹 주조한 활자를 주자소에 납부할 때 검사상 불량자를 제거한 실수(實數)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 재주정리자의 인본으로는 1859년에 시인(試印)한 『국어(國語)』를 비롯하여 『연길구감(涓吉龜鑑)』(1867) · 『유대소신료급중외민인등척사윤음(諭大小臣僚及中外民人等斥邪綸音)』(1881) · 『술몽쇄언(述夢瑣言)』(1884) · 『익위사각도행하예목신정절목(翊衛司各道行下禮木新定節目)』(1893) · 『농담(農談)』(1894) · 『심상소학(尋常小學)』(1896) · 『해유규칙(解由規則)』(1899) · 『진찬의궤』(1903) · 『신묘경과증광사마방목(辛卯慶科增廣司馬榜目)』(1903) 등이 있다.

1883년(고종 20)에는 근대식 연활자(鉛活字)가 이미 수입되어 각 부분의 인쇄에 많이 실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활자로 특히 외국과의 조약서(條約書), 『공법회통(公法會通)』, 갑오개혁 이후의 관보(官報) 또는 학부(學部)가 편집한 교과서 등을 인출하였는데, 이는 이 활자가 중소형(中小型)의 인서체로서 근대식 연활자처럼 인쇄에 편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재주판에 이 활자보다 다소 작은 활자가 보이는 것은 불타고 남은 글자를 자본으로 하여 보주(補鑄)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리자에는 한글활자가 만들어져 병용되었는데, 1797년에 초주정리자로 찍은 『오륜행실도』가 그 예이다.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에 따르면, 이를 ‘초주정리자병용한글활자’라 한다.

한편, 그 한글활자는 『오륜행실도』를 찍기 위하여 만든 4,400자의 나무활자로, 그 만든 목적에 의하여 ‘오륜행실한글자’라고도 일컫는다. 또, 갑오경장 이후 교과서와 관보 등에 재주정리자와 병용된 한글활자가 있다.

이 활자를 ‘재주정리자병용한글활자’라 일컫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오륜행실한글자’와는 자형에 있어 다소 차이가 나는 동활자이다. →활자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판당고(板堂考)』
『주자소응행절목(鑄字所應行節目)』
『홍재전서(弘齋全書)』
『수향편(袖香編)』(정지용, 동문사, 1971)
『한국고인쇄기술사(韓國古印刷技術史)』(김두종, 탐구당, 1974)
『한국고인쇄사(韓國古印刷史)』(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6)
『한국전적인쇄사(韓國典籍印刷史)』(천혜봉, 범우사, 1990)
『圖書板本學要略』(屈萬里·昌彼得, 中華文化出版事業委員會, 民國 44)
「한글활자고(活字考)」(김두종, 『최현배환갑기념논문집』, 1954)
「조선후기의 주자인쇄(鑄字印刷)」(김원룡, 『향토서울』 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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