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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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활자의 주조를 관장하던 관서.
내용 요약

주자소는 조선시대 활자의 주조를 관장하던 관서이다. 중앙관서가 주자 인쇄의 업무를 수행한 것은 고려 때의 서적포로 거슬러 올라간다. 활자주조는 1403년 2월 19일에 시작, 수개월이 걸려 수십만 개를 완성하였는데, 이 활자가 계미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그 위치는 훈도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435년(세종 17)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1460년(세조 6) 주자소를 교서관으로 소속을 옮기고 동시에 전교서라 개칭하였다. 주자소가 교서관에 합속, 운영되어 오다가 조선 초기와 같이 따로 분리, 운영된 것은 정조 때이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활자의 주조를 관장하던 관서.
내용

그 명칭은 조선 태종이 1403년에 설치한 주자소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중앙관서가 주자인쇄의 업무를 수행한 것은 고려 때의 서적포(書籍鋪)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적’의 명칭이 붙은 기관은 문종 때 설치된 서적점이 최초이다.

녹사(錄事) 2인으로 업무를 임시로 맡게 하고, 그 아래에 이속(吏屬)으로 기사(記事) · 기관(記官) · 서자(書者) 각 2인을 두어 실무를 맡게 하였다. 이것은 책의 인출업무를 관장하던 비서성의 분사(分司)인 것으로 보인다.

1101년(숙종 5)에는 국자감에 서적포를 마련하고 비서성의 책판(冊板)을 옮겨 교육에 필요한 책을 자유롭게 찍어 볼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위의 서적점과는 달리 별도로 마련한 기구인 듯하다.

문종 때 설치된 서적점은 그 뒤 여러 차례 개폐의 변화가 있었으나, 고종조까지도 존속하면서 책을 찍어 유통시키는 업무를 맡아보았다.

당시 무인정부의 제1인자였던 최우(崔瑀)가 쓴 발문에 그 사실이 적혀 있다. 그는 임춘(林椿)『서하문집(西河文集)』서경(西京)의 여러 학원에 보내어 새기게 하고 그 책판을 개경의 서적점으로 올려 간직하게 하면서 찍어 널리 보급시켰다.

그런데 고종조의 서적인쇄기관에서는 목판 뿐만 아니라 주자(鑄字)에 의한 인쇄도 아울러 실시하였다. 강화로 천도하기 이전인 13세기 전기에 주자로 찍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를 천도한 뒤인 1239년(고종 26)에 중조(重彫)한 책이 현재 전래되고 있다.

또 강화에서 주자로 『상정예문(詳定禮文)』 50권본을 28부 인쇄하여 여러 관사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원나라의 굴욕적인 종속정사가 자행되어 주자인쇄는 그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리하여 문종조의 비서성이 1298년(충렬왕 24)에 비서감, 1308년에 다시 전교서(典校署)로 개칭, 축소됨과 동시에 서적점 · 우문관(右文館) · 진현관(進賢館) 등과 함께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으로 병합, 축소되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배원사상(排元思想)이 싹트고 주권의 복구의식이 대두되자, 다시 종전처럼 서적포를 두고 주자를 만들어 경사자집의 책은 물론 의방(醫方) · 병서(兵書) · 율서(律書) 등에 이르기까지 고루 찍어 학문에 뜻을 둔 이들의 독서를 널리 권장해야 한다는 건의가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이 사실은 당시의 저명한 학자 정도전(鄭道傳)『삼봉집(三峯集)』 중 「치서적포시병서(置書籍鋪詩幷書)」에 나타나고 있다. 그 요청의 결과 1392년(공양왕 4) 정월 다시 서적원이 설치되고, 주자인쇄 업무를 관장하는 영(令)승(丞)의 직책이 마련되었다.

조선왕조가 수립된 뒤에도 고려 말기의 관제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서적원이 설치되고 영 1인, 승 2인이 경적의 인출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왕조 교체의 혼란시기였으므로 주자인쇄는 실시되지 못하고, 목활자와 목판으로 긴요한 것만을 찍어 사용하였다.

1395년 서적원에서 인출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는 배주지사(白州知事) 서찬(徐贊)이 만든 목활자로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어 뒷받침된다. 신왕조의 기틀이 안정된 시기는 태종 때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바로 1401년 태조 때 설치한 비서감을 교서관으로 개칭하고 서적원도 이곳으로 병합하였다.

그러나 숭유우문정책(崇儒右文政策)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책을 다양하게 찍어 널리 보급해야 했기 때문에 주자인쇄시설의 설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1403년 2월에 주자소의 명칭을 붙인 인쇄기관을 대궐 안 아문(衙門)으로 신설하고, 승정원의 직속으로 하였다.

주자소에서의 활자주조는 그 해 2월 19일에 시작, 수 개월 걸려 수십만 개를 완성하였는데, 이 활자가 계미자(癸未字)이다. 주자소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훈도방(薰陶坊)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서관은 본래 경복궁 사옹원(司饔院) 남쪽에 있어 내관(內館)이라 하였고, 주자소는 서울의 남부(南部) 훈도방에 있어 외관(外館)이라 하였다. 그 인쇄업무는 승정원이 관장하였는데 장소가 궐내외로 서로 떨어져 업무연락에 시간이 걸리고 불편하였기 때문에 1435년(세종 17) 9월에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 주자소의 옛 건물에는 책판을 두고 교서관으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 주자소의 소관업무는 승지 2인이 주관하고, 따로 2품 이상의 문신 1인과 승지 1인을 제조(提調)로 삼았으며, 그 밖에 교서(校書) · 교리(校理) · 참외(參外) 등 2, 3인을 두어 업무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그리고 교대할 때에는 해유(解由)를 자세하게 적어 서로 주고받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인쇄는 그 업무가 중요하므로 유능한 관리를 차정하고, 또 자주 바꾸면 업무가 소홀해져 인쇄업무에 착오가 생길 우려가 있으므로 만기가 되어야만 교체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뒤 문종이 즉위한 1451년 7월 4일부터 12월 17일까지 한때 폐지된 적도 있었다. 그것은 죽은 부왕을 위하여 대군들이 불경을 찍어내는 일을 유신(儒臣)들이 맹렬히 반대하기 때문에 잠시 폐지하고 정음청(正音廳)에서 불경의 인쇄를 은밀히 도와 주기 위함이었다.

1453년 5월에는 불경의 간인과 장책을 위하여 궐내에 따로 마련하였던 책방(冊房)을 합치기도 하였다. 이 책방은 주자소가 아직 궐외에 있었던 세종 때 불경 간인의 은밀성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주자소를 궐내로 옮기고 나서 합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 1460년(세조 6) 5월에 교서관으로 소속을 옮기고 동시에 전교서(典校署)라 개칭하였다. 그것은 주자인쇄업무가 본래 교서관의 소관인데, 그 업무의 중요성에 따라 확장, 설치한 데 지나지 않으므로 그와 같이 합속시킨 것이다.

따라서, 그 직제도 『경국대전』의 교서관조를 보면 야장(冶匠) 6, 균자장(均字匠) 40, 인출장(印出匠) 20, 각자장(刻字匠) 14, 주장(鑄匠) 8, 조각장(雕刻匠) 8, 목장(木匠) 2, 지장(紙匠) 4로 되어 있고, 『대전회통』의 이전(吏典) 잡직조(雜職條)를 보면 수장원(守欌員) 44, 장책원(粧冊員) 20, 사준(司準) 1, 사감(司勘) 1과 같이 주자소의 장인 또는 잡직원들이 규정되어 있다.

주자를 주조하는 경우는 주자도감을 임시로 설치하거나 지방감영 또는 수어청(守禦廳) 등에 명하여 만들어 냈지만, 그 주자는 교서관으로 보내져 인쇄에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교서관에 합속, 운영되어 오다가 조선 초기와 같이 따로 분리, 운영된 것은 정조 때이다.

정조는 조선의 문예를 흥융시킨 호학(好學) 임금으로서 새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내각으로, 그리고 교서관을 외각으로 삼고 관찬서의 편찬 및 간행업무를 촉진시켰다.

그런데 간행업무를 맡고 있는 교서관의 위치가 떨어져 불편하였으므로 돈화문(敦化門) 바깥 중부 정선방(貞善坊)으로 옮긴 바 있었는데, 주자시설은 어정제서(御定諸書)의 인쇄를 위하여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편리하였기 때문에, 1794년(정조 18) 창경궁의 옛날 홍문관(弘文館) 자리에 새로 설치하였다.

이것을 처음에는 감인소(監印所)로 명칭하였으나, 태종 때의 고사에 따라 ‘주자소’로 개칭하였다. 한편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기록을 보면, 정조 때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는 주자소에 ‘奎瀛新府(규영신부)’의 편액을 걸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별칭인 듯하다.

1800년 윤4월의 기사를 보면, 주자소가 다시 홍화문 오른쪽 익랑(翼廊)의 의장고(儀仗庫) 대청으로 옮겨져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1857년(철종 8) 10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빈전도감(殯殿都監)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대청(大廳)은 물론 판당고(板堂庫)가 모조리 불타서 그곳에 있었던 정유자(丁酉字) · 한구자(韓構字) · 정리자(整理字)와 인쇄도구, 그리고 책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58년에 한구자 · 정리자를 다시 주조하고, 교서관에 두었던 임진자(壬辰字)와 함께 한말까지 인쇄에 사용하였다. 이들 활자를 비롯한 그 밖의 활자 일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정조실록』
『철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국대전』
『증보문헌비고』
『대전회통』
『궁궐지』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한경지략(漢京識略)』
『훈도방지(薰陶坊志)』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9)
「이씨조선주자인쇄소사」(김원룡, 『향토서울』 3, 1958)
집필자
천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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