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조선 중기에 세워진 창덕궁의 정문으로 중요시된다. 1412년(태종 12)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문도 함께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이때 세워진 것이다.
돈화문은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다가 차츰 현재와 같은 큰 규모로 개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1451년(문종 1)에 돈화문을 고치라는 왕명이 있었으며 1506년(연산군 12)에는 돈화문을 높고 크게 개조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것은 처음 별궁으로 창건되었던 창덕궁이 차츰 본궁의 구실을 하게 되어, 외국의 사절이 이 궁의 정전(正殿)에서 왕을 배알하거나 국상(國喪)이 있을 때 상여가 나가게 되는 등 궁의 정문을 보다 위엄있고 크게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편 1413년(태종 13)에는 이 문에 무게 1만 5천 근의 동종(銅鐘)을 걸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사가 있다. 궁궐의 정문에 종을 건다는 것은 매우 특수한 예로 종을 건 목적이나 종을 걸기 위해서 어떤 구조가 고안되었는지 흥미로우나, 이때의 건물은 불타 없어졌으므로 단지 그와 같은 사실은 실록을 통하여 알 수 있을 뿐이다.
돈화문은 그 위치가 궁의 서남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는데, 이는 궁의 지형이 동서로 길게 평지가 마련되고 후방과 전방 동쪽에 언덕이 있어 이 지형에 맞추어 건물을 배치한 데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궁의 정문과 정전은 일직선상에 놓이지 않고 정문의 동북쪽에 정전이 놓였다. 이것은 경복궁이나 창경궁의 정문이 정전과 일직선상의 위치에 있는 것과 대조된다.
건물은 넓은 계단이 있는 장대석의 기단 위에 세워졌으나, 이 기단은 현재 아스팔트 포장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다. 12개의 평주가 사방에 있고 가운데 4개의 고주(高柱)가 있어 고주 사이에 거대한 판문(板門)이 두 짝씩 설치되어 있다.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이 짜여지고 그 위에 다포식의 공포가 결구되었다. 공포는 상하층이 모두 내삼출목 외삼출목이며 내부는 끝이 직절(直絶)되고 바닥이 둥글게 되었다. 3제공(諸貢: 공포에서 첨차와 살미가 층층이 짜여진 곳)부터는 끝이 운궁(雲宮)이라고 부르는 둥글둥글한 장식으로 되어 주칸에서는 이것이 천장까지 이르렀고 보 아래에서는 보아지가 되었다. 공포의 이러한 특징은 이 건물이 17세기 초에 지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상층은 갓기둥과 아래층에서 뻗어올라온 고주로 축부를 구성하며, 천장을 설치하지 않아 사람이 서서 활동하기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였다. 지붕마루에는 취두·용두·잡상 등을 설치하였다.
이 건물은 서울 숭례문, 창경궁 홍화문과 함께 조선시대 대규모 문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