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오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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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
이칭
이칭
임신자
내용 요약

경오자는 1450년(경오년) 안평대군 이용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이다. 당대 명필가로 알려진 안평대군의 박력 있는 큰 글씨체가 잘 나타나 있다. 1452년(문종 2)에 주조되었다는 설이 있어 임신자(壬申字)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1455년(세조 1)에 을해자를 주조할 때 녹여 사용함으로써 폐기되었다. 6년밖에 사용되지 못해 그 인본이 별로 많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고금역대십팔사략』·『고문진보대전』·『역대병요』와 근래 국내에서 새로 발견된 『신편산학계몽』 3권 3책이 있다.

목차
정의
1450년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의 글씨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든 동활자.
내용

당시 명필가로 널리 알려졌던 안평대군의 독특한 글씨체가 특히 큰 활자에 박력 있게 잘 나타나 있다. 임신자(壬申字)라고도 일컬어 왔다.

이 활자는 그 명칭에 두 가지 설이 있다. 경오자는 1474년(성종 5) 11월 성종이 『후한서(後漢書)』 등의 역사책을 인쇄하기 위하여 우부승지 김영견(金永堅)에게 당시 사용하고 있는 주자(鑄字)의 종류를 물어 보았을 때 “갑인자(甲寅字)와 을해자(乙亥字)가 있으나 책을 찍어내는 데에는 경오자가 매우 좋은데, 안평대군이 쓴 글자체인 까닭에 녹여버리고 강희안(姜希顔)에게 자본을 쓰게 하여 을해자를 주성하였다.”고 대답한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임신자’는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慵齋叢話』에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경자자(庚子字)를 다시 녹여 안평대군에게 자본을 쓰게 하여 주조한 것이 임신자이다.”라고 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정조실록』·『연려실기술』·『증보문헌비고』를 비롯한 후대의 문헌과 주자발(鑄字跋) 등이 주로 『용재총화』에 의하여 임신자의 활자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요즈음 여러 논문에서도 그 명칭을 자주 인용하여 왔다.

그러던 중 일본의 아시카가학교유적도서관(足利學校遺蹟圖書館)에서 경오자로 찍은 『고금역대십팔사략(古今歷代十八史略)』 10권 10책의 완질본이 발견되었다. 그 책의 권말에는 작은 글자의 경오자로 찍은 주자발에 이어서 ‘경태 2년(1451) 8월 일 인출(景泰二年八月日印出)’의 기록이 있다.

이것은 경오자본 『고금역대십팔사략』이 1451년 8월에 인출되었음을 밝혀 주는 것이며, 『단종실록』에 의하면 그것이 다음해인 1452년(단종 즉위년) 8월 8일에 경오자본 『고문진보』와 더불어 널리 반사(頒賜:임금이 물건이나 녹봉을 내려 나누어 주는 것)되었다. 이로써 이 활자가 1452년(임신년) 이전에 주조된 것이 입증됨에 따라 경오자설의 타당함이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활자가 1450년(경오년)에 주조되었다 하더라도 주조시기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지 않아, 이를 즉위기년으로 표시하는 경우 문제가 제기되었다. 경오년은 세종이 2월 17일에 승하하고 문종이 2월 22일에 즉위한 해이다.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이 쓴 글자모양과 강희안이 쓴 글자모양으로 활자를 다시 주조한 뒤부터는 주자로 책을 찍어내는 것이 점차로 예전과 같지 않았다.”라고 한 기록에 의하여 그 주조연대를 세종 32년으로 잡는 이도 있었다.

경오년에는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대군들이 불사는 물론 불경을 찍어냈는데, 이를 정지시키려는 유신들의 반대상소가 잇달아 올라오자 7월 4일 주자소가 임시로 폐지되었다.

그 뒤부터는 대군들이 정음청(正音廳)에서 은밀히 불경을 찍어냈는데, 10월 우사간(右司諫) 최항(崔恒) 등이 “또 궐내에서 주자를 다시 주성하여 장차 경문을 찍어 궁중의 부녀와 환시로 하여금 모두 쉽게 깨칠 수 있게 한다니 듣는 자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상소하였다.

그 결과 정음청에서의 인쇄는 『소학』을 마지막으로 그해 12월 17일 주자를 주자소로 모두 돌려 보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경오자는 주자소가 임시 폐지되었던 1450년 7월 4일 이후부터 주자의 개주에 관하여 상소하였던 10월 무렵까지의 사이에 주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같은 경오년이라 하더라도 세종 32년이 아니라 문종 즉위년이며, 주조에 관여한 인물은 대군들이고 그 중에서도 안평대군이 주동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경오자는 1455년(세조 1)에 을해자를 주조할 때 녹여 사용함으로써 폐기되었다. 폐기의 이유로 경오자의 글자모양이 송설체(松雪體)의 대표적인 것을 들어 친명반원의 정치적·사회적 문제와 결부시키기도 하지만, 세조 때 만든 을해자와 을유자는 물론 간경도감 국역본(刊經都監國譯本)의 글자모양이 모두 송설체를 바탕으로 한 점으로 보아,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다 사사당했던 안평대군에 대한 반감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경오자는 곧 폐기되어 6년밖에 사용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인본이 별로 많지 않다.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고금역대십팔사략』·『고문진보대전(古文眞寶大全)』·『역대병요(歷代兵要)』와 근래 국내에서 새로 발견된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 3권 3책이 있다.

이 『신편산학계몽』도 『고금역대십팔사략』과 같이 1451년 8월에 인출되어 그 인본이 정교하다. 그리고 경오자의 번각본으로는 『효경대의』가 알려지고 있다. →금속활자, 활자

참고문헌

『세종실록』
『문종실록』
『단종실록』
『성종실록』
『정조실록』
『용재총화(慵齋叢話)』
『필원잡기(筆苑雜記)』
『연려실기술』 별집
『증보문헌비고』
『한국금속활자본』(천혜봉, 범우사, 1993)
『한국고인쇄사』(천혜봉, 한국도서관학연구회, 1975)
『한국고인쇄기술사』(김두종, 탐구당, 1974)
『한국의 서지』(안춘근, 통문관, 1967)
「경오자고(庚午字攷)」(천혜봉, 『성균관대학교논문집』 13, 1968)
「한국고활자본에 대한 연구」(백린, 『서울대학교부속도서관보』 3, 1965)
「근세조선활자체의 변천」(김두종, 『서지』 1, 1960)
「이씨조선주자인쇄소사」(김원룡, 『향토서울』 3, 1958)
집필자
천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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