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타고난 문장력으로 수년간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며 문집 외에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동인시화(東人詩話)』, 『필원잡기』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서거정은 사대부 문인 관료로서 국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훈구 관료로서 역사와 문화 전반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식에 기반하여 『필원잡기』를 저술하였다.
조위(曺偉)의 서문에 “공의 넓은 견식과 민첩한 기억력은 천성에서 나온 것으로 한가한 때에 붓을 들어 평일의 견문을 희롱 삼아 쓴 것이요.”라고 하여 이 책이 그가 보고들은 것을 적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초간본은 서거정의 요청으로 유호인(兪好仁)이 의성군수로 재임 중, 관찰사 이세좌(李世佐)의 지원을 얻어 1487년(성종 18)에 간행하였다. 초간본에는 조카 서팽소(徐彭召)와 문인 표연말(表沿沫), 문생 조위(曺偉)의 서문이 붙어 있으며, 문인 이세좌의 발문이 붙어 있다.
초간본은 임진왜란 · 병자호란의 병화로 많이 산실되고, 사본도 얻어 보기 어렵게 되자 서거정의 6대손 서정리(徐貞履)가 의성군수로 재임 중 중간(重刊)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중도에 근무지를 옮기게 되면서 일이 중단되었고, 또 재력도 모자라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안동부사 임담(林墰)과 전주부윤 김남중(金南重)이 공장(工匠)과 남은 판을 보내 도와줌으로써 1642년(인조 20년) 10여 개월 만에 중간을 마칠 수 있었다. 중간본은 팽소 · 조위와 표연말의 서문이 붙어 있고, 이세좌 · 서정리의 발문이 붙어 있으며, 간기는 ‘청풍군 중간(淸風郡重刊)’으로 나와 있다.
『대동야승』과 『광사(廣史)』에도 수록되었다. 초간본에 의한 사본을 저본으로 삼은 듯보이며 중간본의 발문이 없다. 다만 『광사』 수록본에는 김려(金鑪)의 「정사발(淨寫跋)」이 붙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및 고려대학교 만송문고(晩松文庫) · 산기문고(山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에서 간행한 『국역 대동야승』Ⅰ에 번역본이 김두종(金斗鍾)의 해제와 함께 들어 있다. 1972년 『한국(韓國)의 사상대전집(思想大全集)』 8에 이경선(李慶善)의 해설과 성낙훈(成樂熏)의 번역문이 수록되었다. 1981년 서광일(徐光日)이 해제 · 색인을 붙여 을유문고(乙酉文庫)에서 번역본을 내었다.
이 책은 2권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권 1은 96화, 권 2는 77화로 총 173화가 실려 있다. 서거정의 조카 서팽소는 이 책이 구양수의 『귀전록(歸田錄)』을 모범으로 삼으면서 국로(國老)의 한담(閑談)과 동헌(東軒)의 잡록을 취하여 만들었으며, 사관이 기록해 주지 않은 조야(朝野)의 한담(閑談)을 기록하였다고 했다. 이러한 평에 걸맞게 서거정은 해박한 지식과 깊은 식견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사적(事跡)을 널리 채집하여, 위로는 조종조(祖宗朝)의 창업에서부터 아래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의 도덕 언행과 문장(文章) 정사(政事)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내용을 다루었다. 또한 국가의 전고(典故)와 여항(閭巷) 풍속(風俗)의 세교(世敎)에 관한 것, 국사(國史)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 등을 격식에 매이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정연한 필체로 기술하였다.
이 책은 고려시대 『역옹패설(櫟翁稗說)』이나 『파한집(破閑集)』 등의 필기 잡록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후대 필기류의 선구가 될 뿐 아니라 조선 초기의 인정 · 풍물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