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소유(少游), 호는 남계(藍溪)·평석(平石). 함양 출신. 할아버지는 표하(表河)이고, 아버지는 감찰 표계(表繼)이며, 어머니는 정랑 안홍기(安鴻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약관에 문행(文行)이 세상에 알려지고 당대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다. 같은 문하의 조위(曺偉)·김일손(金馹孫) 등과 깊은 교유관계를 가졌다.
1469년(예종 1) 사마양시에 합격했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고, 1485년 사의(司議)로서 『동국통감』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문과중시에 다시 병과로 급제한 뒤, 장령·사간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90년에는 이조참의·대사성이 되고, 1492년에는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벼슬 첫길인 예문관 시절에 한림의 여러 선생들이 관례로 신관(新官)들을 침포(侵暴)하여 금육(禁肉)과 여악(女樂)으로 주연(酒宴)을 베푼 사실이 성종에게 알려져 징계가 내렸는데, 그도 이 자리에 들었다가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가 지내게 되었다.
이후로 향회(鄕會)에서 금육을 차린 것을 보면 결코 성법(聖法)을 다시 어길 수 없다 하고 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의 상을 주자의 『가례』에 따라 치른 일로써, 스승인 선산부사 김종직의 추천을 받아 자급(資級)이 하나 높여졌다. 그 뒤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무오사화 때 경원으로 유배가던 중 객사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서거정(徐居正)의 문생이 된 인연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논학(論學)」이라는 글에서 김종직의 문인을 중심으로 하는 초기 사림파의 학문관과 정치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1507년(중종 2)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함창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제향되었다. 1517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854년(철종 5)에 후손 표석준(表奭峻)이 간행한 『남계문집』 4권 2책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