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훈 ()

성낙훈
성낙훈
한문학
인물
해방 이후 성균관대학교 교수, 민족문화추진회 발족 초대회원 등을 역임한 학자. 동양철학자.
이칭
자목(子沐)
방은(放隱)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1년
사망 연도
1977년
본관
창녕(昌寧)
출생지
함안(咸安)
정의
해방 이후 성균관대학교 교수, 민족문화추진회 발족 초대회원 등을 역임한 학자. 동양철학자.
개설

호적명은 성경조(成庚祚).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목(子沐), 호는 방은(放隱). 경상남도 함안 출신. 아버지 성만영(成晩永)과 어머니 재령 이씨의 맏아들이다.

생애와 활동사항

성낙훈은 한학을 독학하여 동양의 문학·사학·경학·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유교·불교·도교 철학에 정통하였고, 그 중에서 불교철학에 더욱 심취하였다.

성낙훈은 1926년에 일본·만주 등지를 일주하고 돌아와 1928년 경주 안씨 안춘화(安春和)의 둘째 딸과 결혼하였다. 1929년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교경전을 공부하고자 불경을 강(講)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성낙훈은 1947년 서울대학교 중문과 조교에 임용되었다. 고려대학교·성균관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52년에 전북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6·25사변으로 부산에 피난하였던 성균관대학교의 동양철학과 조교수에 겸임되어 전주지역에 있던 전시연합대학의 학생을 지도하였다. 1953년 경북대학교 철학과 전임강사·조교수를 거쳐 1964년에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로 옮겼다. 1969년에 사직하였다.

성낙훈은 경북대학교 40년사에, “선생의 강의는 무소불통의 해박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나날이 그 인기를 높여갔다.”라고 기술된 것처럼 학교의 강의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정통한 한문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한문·중국역사·철학의 원전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그를 찾아와 모였는데, 그들을 대단히 열성적으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성낙훈은 1969년에는 동방고전연구원을 설립하여 많은 제자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또한 이 무렵 근대화의 물결에 한문학에 대한 학교교육이 소홀하게 되고, 한학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간파하고 고전국역사업을 제창하여 민족문화추진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이 단체를 육성하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성낙훈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한국당쟁사(韓國黨爭史)』·『한국유교사』·『한국유교사상사』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이 있고 교열한 업적도 많다. 1977년 1월 1일 작고하였다. 1979년 문하생들이 그의 유고를 모아 『한국사상논고(韓國思想論稿)』를 발간하였다.

상훈과 추모

고전국역의 기반을 구축한 공로가 인정되어 1974년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을 받았다. 광주공원에 있는 묘소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사상논고』(방은기념사업회 편, 동화출판공사, 1979)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정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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