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명은 성경조(成庚祚).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목(子沐), 호는 방은(放隱). 경상남도 함안 출신. 아버지 성만영(成晩永)과 어머니 재령 이씨의 맏아들이다.
성낙훈은 한학을 독학하여 동양의 문학 · 사학 · 경학 · 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유교 · 불교 · 도교 철학에 정통하였고, 그 중에서 불교철학에 더욱 심취하였다.
성낙훈은 1926년에 일본 · 만주 등지를 일주하고 돌아와 1928년 경주 안씨 안춘화(安春和)의 둘째 딸과 결혼하였다. 1929년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교경전을 공부하고자 불경을 강(講)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성낙훈은 1947년 서울대학교 중문과 조교에 임용되었다. 고려대학교 · 성균관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에 강사로 출강하였다. 1952년에 전북대학교 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6·25사변으로 부산에 피난하였던 성균관대학교의 동양철학과 조교수에 겸임되어 전주지역에 있던 전시연합대학의 학생을 지도하였다. 1953년 경북대학교 철학과 전임강사 · 조교수를 거쳐 1964년에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교수로 옮겼다. 1969년에 사직하였다.
성낙훈은 경북대학교 40년사에, “선생의 강의는 무소불통의 해박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나날이 그 인기를 높여갔다.”라고 기술된 것처럼 학교의 강의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정통한 한문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한문 · 중국역사 · 철학의 원전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그를 찾아와 모였는데, 그들을 대단히 열성적으로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성낙훈은 1969년에는 동방고전연구원을 설립하여 많은 제자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또한 이 무렵 근대화의 물결에 한문학에 대한 학교교육이 소홀하게 되고, 한학자가 점차 줄어들었다. 이러한 시대상을 간파하고 고전국역사업을 제창하여 민족문화추진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이 단체를 육성하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성낙훈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한국당쟁사(韓國黨爭史)』 · 『한국유교사』 · 『한국유교사상사』 등이 있다. 번역서로는 원효의 『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이 있고 교열한 업적도 많다. 1977년 1월 1일 작고하였다. 1979년 문하생들이 그의 유고를 모아 『한국사상논고(韓國思想論稿)』를 발간하였다.
고전국역의 기반을 구축한 공로가 인정되어 1974년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을 받았다. 광주공원에 있는 묘소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