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을 정통으로 파악한 최초의 선례는 17세기 홍여하(洪汝河)의 『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이다.
이익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성호선생문집(星湖先生文集)』 권38에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이라는 글을 실었다. 위만(衛滿)이 나라를 합당하게 계승하지 않고 찬탈하였으므로 그를 기자조선 정통의 정당한 계승자로 볼 수 없고, 그 정통은 기준(箕準)이 남쪽으로 옮겨와 세웠다고 하는 마한(馬韓)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이익의 삼한정통론은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의『동사강목(東史綱目)』에 반영되었다.
삼한정통론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단군·기자 이래 중국과 같은 시기에 일어나서 같은 시기에 왕조가 망하였다. 기자는 팔조교(八條敎)를 펴 우리나라에 삼강오륜을 밝혔다. 단군·기자대에는 요하(遼河) 이동, 임진(臨津) 이북이 중심부였고 한강 이남의 삼한지역은 변방 지역이었다.
기준(箕準)은 왕에 즉위한 지 20년에 도둑(위만)을 피해 남천(南遷)하여 마한을 개창하였다. 속국 50여 국을 거느리면서 기자로부터 시작된 인현(仁賢)의 교화를 마한왕이 계승하였으니, 동방의 정통이 끊어지지 않고 마한에 계승되었다.
위만은 찬탈자로서, 이를 기자의 계승자로 보아온 것은 잘못이다. 강약(强弱)은 한때의 형세에 지나지 않으나, 대의(大義)는 움직일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이를 알지 못하고 마한의 평가를 인몰시켜 왔다.
신라의 사신이 왔을 때 사대의 예로써 꾸짖었고, 변한이 직공(職貢)을 바쳤으며, 백제가 웅진(熊津)에 군사 방어시설을 하자 땅을 떼어준 은혜를 저버렸다고 책하였다. 이에 백제에서는 부끄러운 줄 알고 성을 허물어 천도하였다.
위만정권은 80년간 지속되었으나 마한은 117년간 지속되었다. 서북 일대가 한사군(漢四郡)으로 되었어도 우리 역사는 마한으로 계승되었다. 나라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여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음은 중국역사에서도 같은 사례가 있다.
마한의 이런 계승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를 예의를 알고 어진 나라라고 칭해온 지가 오래되었다. 따라서, 마한의 역사를 쓸 때는 춘추필법에 따라, 백제가 습격한 사실은 ‘백제입구(百濟入寇)’로, 원산·금현성(金峴城)의 항복은 ‘이성함(二城陷)’으로, 마한이 망할 때 구장(舊將) 주근(周勤)이 죽었다는 표현은 ‘마한구장 주근이 우곡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바쳤다.’로 써야 한다.”
이익은 마한이 망할 때까지는 삼국의 역사를 강목체에 의하여 마한의 예속국으로 기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18세기 성리학의 도덕적 역사이론을 실제 우리 역사에 적용한 한 실제 사례이다.
단군과 기자의 건국이 중국왕조와 그 흥망을 비슷한 시기에 하였다는 견해는 고려 말 일연(一然)이나 이승휴(李承休) 이후 조선 전기의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어 오던 견해였고, 16세기 이래 기자를 성현으로 크게 존중하던 경향이 역사에 반영된 것이다.
정통론은 주자(朱子)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가장 중시하는 항목으로서, 역사의 서술을 통하여 유교적 교훈을 주려는 목적이 있었다.
한편, 종래에는 삼한정통론을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독자적 역사로 파악하려고 했으나 이는 정통론의 근본정신과 그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학 발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삼한정통론은 이후 성리학적 역사관이 없어질 때까지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이 삼한정통론에 의거하여 고대사를 서술하였다. 그 결과 마한이 멸망할 때까지는 삼국을 독자적 국가로서 처리하지 않고 마한의 예속국가였던 것처럼 서술하였다. 이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근대 및 현대의 역사학과는 다른 중세적인 역사학의 속성이었다.
삼한의 역사가 고구려·백제·신라와 연결된다는 의식은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에 의해서였다. 그는 마한은 고구려로, 진한은 신라로, 변한은 백제로 계승되는 것으로 규정하였고 이러한 견해가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편자인 김부식(金富軾)은 이를 하나의 설로 취급하였을 뿐 『삼국사기』 서술에서는 이를 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조에서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삼한을 통일하였다는 표현을 여러 번 쓰고 있는데, 이는 후삼국의 통일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원삼국을 통일하였다는 의미로 사용하였으며, 고려조에서의 삼한은 삼국을 대칭한 용어, 또는 전국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삼한을 삼국과 직접 연결시켜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간접적으로는 최치원의 설을 따르고 있다. 마한은 조선왕 준(準)이 위만에 쫓겨 내려가 건국하였다는 『위서(魏書)』의 기사를 인용하고, 뒤에 마한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는 최치원의 설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서가 위만조선 다음인 것으로 보아 『위서』의 기록을 신봉했다고 할 수 있다.
변한에 대하여는 신라에 복속된 기록과 변한의 백제설, 변한의 고구려설을 기록하였으나, 변한과 백제를 한 항목으로 편차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최치원의 설을 신뢰하였다. 진한이 신라가 되었다는 데에는 이설이 없으므로 『삼국유사』의 찬자 일연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조선 초기 권근(權近)은 『동국사략(東國史略)』을 편찬하면서 변한에서 고구려로, 마한에서 백제로 계승되었다는 설을 제기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자들은 최치원이 더 가까운 시대에 살았다는 점을 들어 그의 설을 취하였다.
17세기 초 한백겸(韓百謙)은 삼한과 삼국의 연계설을 부정하면서 삼한은 한강 이남 지역에 존재한 것으로 보았다. 그 시대에 한강 이북은 조선·한사군 지역이었다고 지적하였고, 변한을 가야지역으로 고증하였는데 이후 역사지리학자들은 거의 이 설을 따르게 되었다.
안정복도 지역적으로 삼한은 한강 이남에 있었다는 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역사서술에 있어서는 삼한정통론에 의거하여 서술하였다.
따라서 삼한정통론은 도덕적 평가가 가해진 설이고 역사지리학은 도덕적 평가를 배제하고 사실을 밝힌 점에 차이가 있다. 삼한정통론은 종래의 삼한과 삼국의 연계를 주장하는 설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