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과 발문이 없어 정확한 편찬연대나 찬술의도는 알 수 없으며, 모두 188면으로 엮어진 한국 고대에 관한 역사서이다.
이 책은 한국의 고대사를 세가(世家)로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일반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명분사상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형태상의 특징으로는 발해세가가 신라 · 고구려 · 백제와 마찬가지로 세가의 지위에서 동사(東史)의 체계 내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조선 후기의 발해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단군조선 이래 고구려까지의 광대한 강역을 발해가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지식인들의 발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을 일깨우기 위한 목적에서 서술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편찬에는 ≪삼국사기≫를 주로 참고하되, ≪동국통감≫과 중국 정사의 조선전 기사로 보충하고 지명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간단히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기도 하였다. 특히 발해세가는 ≪신당서≫ · ≪구당서≫를 적당히 취사선택하여 엮고 여기에 ≪송사 宋史≫와 ≪고려사≫를 보충하여 편술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전체 구성은 신라세가 · 고구려세가 · 백제세가 · 발해세가로 되어 있으며, 주로 ≪삼국사기≫의 본기 기사를 주자료로 하여 국가 일대의 흥망의 기사를 간추려 적고 있다.
특히 <발해세가>는 ≪신당서≫ 발해전 기사를 주로 하되 ≪구당서≫ 발해말갈전의 기사로 보충하고 있어 기사에서 많은 혼란과 탈오가 발견되며, 발해의 위치비정도 ≪신당서≫를 따르고 있어 많은 오류가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 책의 찬술동기 내지 홍석주의 사학사상은 각 세가에 첨기한 4편의 찬(贊)에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세가>에서는 1,000년간의 역사에서 어진 임금과 신하의 덕업이 기록으로 전하지 않음을 한탄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유로 초기의 군주가 근검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그 신하들은 굳게 지조를 지켜 목숨을 바쳤고, 백성들이 모두 질박하고 곧아 꾸밈이 없었음을 들었다.
또 경순왕이 백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국가를 고려에 바친 것은 의리상으로는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자손이 지금까지 번성한 것을 보면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진실로 천도(天道)의 도운 바가 아니겠는가라고 썼다.
<고구려세가>에서는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고 평양에는 동명왕의 유적이 많다는 당시의 이야기를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즉 동명왕이 나라를 일으킨 곳은 압록강 서북이었으며 6대손 동천왕 때에 비로소 평양에 거주하였는데 어찌 동명왕 때에 평양을 보았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 고구려는 조그만 국가로서 천하의 강국이 되었으니 어찌 어질고 지혜로운 신하의 도움을 받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오직 을지문덕의 공만을 이야기하며, 이도 중국사서가 아니면 나타나는 것이 없고, 안시성주의 이름이 전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고 기술하며 전해지는 기록이 부족하여 황당기괴한 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쓰고 있다.
또 자신이 압록강을 건너 동으로 옥저, 서북으로 요수까지 가보았는데, 이 땅은 모두 옛 고구려의 영토이며, 아직까지 그 풍속이 질박하고 굳세어 싸우던 나라의 풍속이 남아 있으니 이로 미루어 고구려 당시의 풍속을 짐작할 수 있다고 썼다.
<백제세가>에서는 중국측 자료의 부실함을 논하고 세상에서는 백제가 신라에 도전하여 싸움을 그치지 않아 망했다고 하나, 백제에 있어 신라는 백세의 원수였기에 화평할 수가 없었으며, 만약 의자왕이 놀이와 술에 방탕하지 않고 간쟁하는 신하를 죽이지 않고 백성을 잘 다스렸으면 신라가 어찌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발해세가의 찬에서는 발해가 40만의 군을 동원할 수 있는 대국으로 200여 년이나 존속하였으며 법제와 문물이 고도로 발전한 나라였음을 강조하면서, 그 강역이 신라 이북으로 단군조선 이래 고구려의 강역을 대부분 장악하였는데도 우리 나라에 발해의 역사를 말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상세히 기술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사학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먼저 역사를 전국민의 역사로 파악하는 새로운 관점을 선보였고, 왕 · 신하 · 백성이 국가발전의 주체임을 강조하고 세상의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또 중국측 기록보다는 우리 나라의 기록을 신뢰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으며, 조선 전기에 고구려의 역사를 한반도에 비정하려 한 경향을 시정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17세기 이후의 역사지리학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는 당시 지식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이나 사실과 다르게 전해지는 세상사람들의 이야기를 바로잡기 위해 역사를 편찬한다고 하는 사실적인 태도와, 역사는 문헌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실증적인 견해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