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 ()

고사관수도 / 강희안
고사관수도 / 강희안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우(景遇)
인재(仁齋)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18년(태종 18)
사망 연도
1464년(세조 10)
본관
진주(晉州)
주요 작품
오두연수도(橋頭烟樹圖)|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윤공간공형묘비(尹恭簡公炯墓碑)
주요 관직
호조참의|황해도관찰사
내용 요약

강희안은 조선전기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418년(태종 18)에 태어나 1464년(세조 10)에 사망했다. 1441년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돈녕부 주부, 집현전 지제학 등을 지냈다. 1455년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는데 1456년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訊問)을 받았다. 시를 잘 짓고, 전서와 예서, 산수화와 인물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두연수도」와 「산수인물도」·「고사관수도」 등이 있다.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 『양화소록』을 저술하였다.

정의
조선 전기에, 호조참의,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東北面) 순무사(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동생이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41년(세종 23)에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돈녕부 주부(主簿)가 되었다. 1443년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1444년 최항(崔恒) · 박팽년(朴彭年) ·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주1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했고, 1445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석을 붙였다.

1447년 이조 정랑이 되었고, 같은 해 집현전 직제학 최항 · 성삼문(成三問) · 이개(李塏) 등과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하였다. 1450년 왕이 위독하자 부지돈녕(副知敦寧)의 직에 있으면서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經文)을 썼다. 1454년(단종 2)에 집현전 직제학에 올랐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주2되었다. 1456년에 단종복위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화를 면했다.

후일에 다시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左司諫) 이종검(李宗儉)이 처벌을 요구했지만 왕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1460년 호조 참의 겸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1462년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표 · 주3을 받들고 주4에 다녀왔으며, 146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다. 1464년에 사망했다.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으며, 특히 전서(篆書) · 예서(隷書)주5에도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시는 주6 · 주7과 같다는 평이 있으나 자신의 글을 세상에 발표하기를 꺼려 전하는 것이 없다. 그림은 주8의 유용(劉墉) · 주9, 글씨는 진(晉)나라의 주10주11주12에 비견되기도 했다.

기록상으로 전하는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다. 그리고 영모화(翎毛畵) · 산수화 · 인물화에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여인도(麗人圖)」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 · 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기보(奇寶)라 할 수 있다.

1454년(단종 2) 산천 형세를 잘 아는 예조 참판 정척(鄭陟), 지도에 밝은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수양대군이 주도한 8도 및 서울의 지도 제작에 참여했다. 1445년 명나라에서 보내온 ‘體天牧民永昌後嗣(체천목민영창후사)’의 여덟 자 옥새를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추천해 쓰게 했다. 세조 때에 임신자(壬申字)를 녹여서 새로 글자를 주조할 때 글씨를 직접 썼는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다.

글씨 쓰기를 꺼려 필적으로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성격은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 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했고 또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해 젊어서부터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해 한때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는데, 여기에는 꽃을 가꾸는 일을 경륜(經綸)의 뜻에 비추어 서술하고 있다.

그림으로는 「오두연수도(橋頭烟樹圖)」와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 · 「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와 「윤공간공형묘비(尹恭簡公炯墓碑)」가 남아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나재집(懶齋集)』
『허암유고(虛庵遺稿)』
주석
주1

예전에, ‘한글’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

주2

훈공을 장부나 문서에 기록함. 우리말샘

주3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외교문서를 말한다. 우리말샘

주4

1368년에 주원장이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세운 중국의 통일 왕조. 영락제 때 난징(南京)에서 베이징으로 도읍을 옮기고 몽고와 남해에 원정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뒤에 북로남왜에 시달리고 환관의 전횡과 당쟁, 농민의 반란이 끊이지 않아 1644년에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5

십체의 하나. 예서(隸書) 이분(二分)과 전서(篆書) 팔분(八分)을 섞어서 장식적인 효과를 낸 서체로, 중국 한(漢)나라 채옹이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말샘

주6

중국 당나라의 시인(737~804?). 도연명과 함께 도위(陶韋)라고 불릴 만큼 쌍벽을 이루었다. 시집에 ≪위소주집(韋蘇州集)≫ 10권이 있다. 우리말샘

주7

중국 당나라의 문인(773~819). 자는 자후(子厚).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고문(古文) 부흥 운동을 한유(韓愈)와 더불어 제창하였다. 전원시에 뛰어나 왕유ㆍ맹호연ㆍ위응물과 나란히 칭송된다. 작품에 <봉건론(封建論)>, <영주팔기(永州八記)#GT#따위가 있으며,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우리말샘

주8

중국 주나라 때에, 무왕이 은나라 주왕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에게 은나라 유민을 통치하게 하기 위하여 세운 나라. 상구에 도읍을 정하고 춘추 시대의 12제후의 하나가 되었으나, 기원전 286년에 제, 위, 초의 세 나라에 멸망하였다. 우리말샘

주9

중국 북송(北宋)의 화가(?~?). 자는 순부(淳夫). 계절에 따른 경관(景觀)의 변화, 빛과 구름의 상태 따위의 묘사에 뛰어났다. 작품에 <계산추제도권(溪山秋霽圖卷)>, 저서에 화론(畫論) ≪임천고치≫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0

중국 진(晉)나라의 서예가(307~365). 자는 일소(逸少). 우군 장군(右軍將軍)을 지냈으며 해서ㆍ행서ㆍ초서의 3체를 예술적 완성의 영역까지 끌어올려 서성(書聖)이라고 불린다. 작품에 〈난정서(蘭亭序)〉, 〈상란첩(喪亂帖)〉, 〈황정경(黃庭經)〉, 〈악의론(樂毅論)〉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11

1271년에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몽고, 티베트를 영유하여 몽고 지상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신분제를 세웠으나 1368년에 주원장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봉기로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12

중국 원나라의 화가ㆍ서예가ㆍ문인(1254~1322). 자는 자앙(子昂). 호는 집현(集賢)ㆍ송설도인(松雪道人). 서화와 시문에 뛰어나서 원나라의 사대가(四大家)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저서에 ≪상서주(尙書注)≫, ≪송설재집(松雪齋集)≫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권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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