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화는 새와 동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동물화라고도 한다. 원래는 새 그림만을 지칭했으나 근세에 들어 영모를 새 깃털과 동물 털로 확대 해석하여 화조화와 동물화를 포함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새와 동물은 인간의 삶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벽사와 길상의 대상으로 즐겨 그려졌고, 문인 사대부들의 취향에 부합하는 매체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산수화와 인물화 다음으로 비중이 컸던 화목이다. 우리 나라의 영모화는 고려시대부터 독립된 화목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각 시대 화단의 조류에 발맞추어 변화하면서 독특한 한국적 화풍을 형성하여 회화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산수 · 인물 다음으로 비중이 컸던 화목이다. 원래는 영모를 새 깃털의 의미로 풀이하여 새 그림만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근세로 오면서 두 글자의 자의(字義)를 각각 나누어 새 깃털과 동물 털이라는 복합적 의미로 확대 해석하여, 현재는 화조화와 동물화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새와 동물은 인간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서식하는 동반자로서 생태적 특성과 효용성 등이 인생의 소망과 결부되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벽사(辟邪)와 길상(吉祥)의 대상으로 즐겨 그려졌다. 그리고 문인 사대부들의 취향과 밀착되어 자연의 오묘한 이치와 조형을 깨닫고 그 흥취나 시정(詩情)을 느끼게 하는 매체로서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중국에서는 당대부터 북송대에 걸쳐 구륵전채법(鉤勒塡彩法)과 수묵몰골법(水墨沒骨法) 같은 표현 기법의 완성과 함께 감상화로서의 전통이 수립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고구려 고분 벽화 등을 통하여 소재별로 그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전은 고려시대부터였다. 북송의 곽약허(郭若虛)가 1070년경에 쓴 『도화견문지(圖畫見聞誌)』 「기고려국화(記高麗國畫)」에 “고려의 쥘부채에 ‘부인안마(婦人鞍馬)’를 비롯하여 ‘화목수금지류(花木水禽之類)’가 그려져 있다.”고 하였듯이, 늦어도 11세기 무렵에는 하나의 독립된 화목으로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 후기에 이르러 이규보(李奎報)가 “새와 짐승을 그린 것을 완상하려고 좌우에 두네.”라고 읊었던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감상화로서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영모 작품이 남아 있지 않아 그 구체적인 양상은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공민왕의 전칭작인 정묘한 원체풍의 「이양도(二羊圖)」(간송미술관 소장)를 비롯하여, 고려 후기의 불화에 그려진 화려한 새 그림과 청자와 동경 등의 공예품에 보이는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 · 연지수금문(蓮池水禽文) · 노안문(蘆雁文) · 쌍학파초문(雙鶴芭蕉文) 같은 종류의 서정성 높은 문양을 통하여 그 편영을 엿볼 수 있다.
(1) 조선 초기
조선시대에 이르러 영모화는 다른 분야의 회화와 더불어 문인화가와 화원들에 의하여 즐겨 애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화원의 시취(試取)에 인물화와 함께 3등과목으로 채택될 정도로 그 위치가 확고해졌다. 조선 초기(1392∼약 1550년)에는 성종과 같은 군왕이 궁정 안에 ‘초목금수(草木禽獸)’를 모아 놓고 화원들로 하여금 사생하게 하는 등, 영모화의 묘사력 증진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현재 전하는 이 시기의 영모화들은 대체로 대경식 구도(大景式構圖)에 정교한 필치와 화려한 설채(設彩 : 색을 칠함)를 특징으로 하는 구륵전채법의 원체풍과 소경(小景)의 간결한 구도에 묵법(墨法)으로 음영을 처리하고 담채를 곁들인 수묵몰골풍의 두 가지 경향으로 구분된다. 원체풍의 경향은 전시기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안귀생(安貴生)의 전칭작인 「원앙도」와 신잠(申潛)의 전칭작인 「화조도」 등에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수묵몰골풍은 사대부들의 취향과 밀착되어 부각된 것으로 김정(金淨)의 화조화와 이암(李巖)의 동물화들이 이 시기를 대표하였다. 특히, 개와 강아지 · 고양이의 귀엽고 천진스러운 모습을 즐겨 그렸던 이암의 작품들은 구성의 묘와 음영의 효과 그리고 평화로움과 서정이 넘치는 정경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회화 세계를 이룩하고 조선시대 영모화풍의 근간을 이루었다.
(2) 조선 중기
조선 중기(1550∼약 1700년)의 영모화는 이암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초기의 수묵몰골풍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러한 흐름은 김시(金禔)- 김식(金植), 이경윤(李慶胤) · 이영윤(李英胤)- 이징(李澄), 조속(趙涑)- 조지운(趙之耘) 등의 연안김씨 · 전주이씨 · 풍양조씨 등 문인 사대부집안 출신 화가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이들은 소와 말, 기러기와 원앙, 까치 등의 소재를 절파풍(浙派風)의 간일한 소경산수(小景山水)를 배경으로 정취 넘치는 이 시기 특유의 화풍을 완성하였다. 동물화에서는 음영 부위를 짙고 옅은 먹으로 선염하여 그 양감을 강조하였다. 특히 흑백 대비의 양식화 현상을 통하여 정감 어린 한국적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화조에서는 몰골풍의 묵법과 함께 성글고 거친 붓질을 가미하여 야취(野趣)와 의취(意趣)를 동시에 추구하기도 하였다.
새와 짐승들의 정취를 자연미와 이념미가 융합된 미의식에 바탕을 두고 나타냈던 이러한 화풍은, 윤신지(尹新之) · 전충효(全忠孝) · 이건(李健) · 이함(李涵) · 이하영(李夏英)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 중기 영모화풍의 대종을 이루었다. 이에 비하여 구륵전채법의 원체풍은 윤엄(尹儼) 등의 일부 화가들이 다루었을 뿐 수묵 위주의 경향에 밀려 약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3) 조선 후기
조선 후기(약 1700∼약 1850년)에는 진경산수화나 풍속화 같은 현실적 소재에 대한 관심의 증진과 사실적인 서양화법의 유입 그리고 남종화법 등의 유행에 따라 영모화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동물화에서는 세심한 관찰력과 정밀한 묘사력을 바탕으로 그려진 원체풍과 사생풍이 융합된 사실적인 화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정선(鄭敾)의 경우 세밀묘(細密描)와 몰골묘(沒骨描)의 대조적인 기법과 고운 설채의 효과를 이용하여 집 주위에서 한가롭게 지내고 있는 고양이를 아름다운 겹국화 등을 배경으로 훌륭하게 담아 놓았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고양이를 잘 그려 변고양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변상벽(卞相璧)에 이르러 서정성과 사실성의 극치를 보이면서 이 시기 동물화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밖에도 윤두서(尹斗緖)의 말 그림과 김두량(金斗樑)의 개 그림, 김홍도(金弘道)의 호랑이 그림 등이 생동감 넘치는 사실풍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작가미상의 「맹견도(猛犬圖)」는 서양화풍의 영향을 가미하여 종래 볼 수 없던 입체감의 표현 기법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화조화에서는 명대의 수묵 화조화법과 남종화의 수묵담채화법이 혼재된 다소 거칠면서도 활기에 찬 몰골법 계열의 화풍이 심사정(沈師正) · 최북(崔北) · 박제가(朴齊家) · 이방운(李昉運)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두되었다. 그리고 남종화법을 토대로 하면서도 보다 시적이고 서정적인 정취와 개성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화풍이 김홍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김홍도는 물오리와 까치 · 매 · 꿩 · 학 등을 잘 그렸는데, 현존하는 유작의 대부분이 구도나 필법 · 나무 · 바위 등의 묘사법에서 그 특유의 개성을 짙게 보여 준다. 1796년(정조 20)에 그린 「병진년화첩(丙辰年畫帖)」(호암미술관 소장) 중의 화조도들과 「송계쌍치도(松溪雙雉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을 대표작으로 하는 그의 화조화풍은 전원풍의 사경산수를 배경으로 당시 그가 살던 주변의 정취와 계절적 분위기를 시정의 세계로 환원시켰다는 데 큰 특징이 있다. 특히 이들 그림에는 사선식의 구도를 비롯하여 맑고 투명한 담채의 효과, 강한 먹선의 액센트 등을 통하여 당시인들의 정서의 깊이를 격조 높게 승화시켰다.
김홍도의 이러한 화풍은 동료인 이인문(李寅文)과 아들인 김양기(金良驥)를 비롯하여 신윤복(申潤福) · 김득신(金得臣) · 이수민(李壽民) · 장한종(張漢宗) · 조정규(趙廷奎) · 이한철(李漢喆) · 유숙(劉淑) 등 조선 후기와 말기의 여러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들 화가들은 김홍도의 영향과 함께 『십죽재화보(十竹齋畫譜)』와 『개자원화전(芥子園畫傳)』과 같은 화보 그림들을 즐겨 다루었다. 김득신과 김양기 · 유숙의 경우에는 구도나 필치 등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개성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4) 조선 말기
조선 말기(1850∼1910년)에 이르러 영모화는 민화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그러나 정통화에서는 화단의 전반적인 침체 현상으로 인해 전 시기의 성행에 미치지 못하였다. 특히 이 시기를 풍미하였던 김정희(金正喜) 일파의 회화 취향이 산수와 사군자를 포함한 화훼 분야에 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희의 사의성(寫意性) 짙은 다람쥐 그림을 제외하고는 이들 추사파 화가들이 이 분야에서 남긴 유작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듯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이 시기의 영모화는 일부 화가들에 의하여 청대(淸代) 화풍의 수용 등을 통하여 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특색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홍세섭(洪世燮)에 의하여 주도된 이색화풍(異色畫風)은 근대적인 감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시원하고 맑은 담묵과 특이한 농묵 처리로 서구풍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홍세섭의 참신한 영모화풍은 유항(劉沆) 등에게 얼마간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조선 왕조의 멸망에 따라 더 이상 발전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조선 말기 영모화의 마지막을 장식한 화가는 다른 분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장승업(張承業)이었다. 그는 중국의 역대 화풍 중 특히 청대의 화적을 섭렵하고 이를 종합, 절충하여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대담하고 호방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는 매 그림을 비롯하여 기러기의 머리를 유난히 크게 그렸던 노안도와 말 그림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이러한 화풍은 양기훈(楊基薰)과 강필주(姜弼周)의 노안도 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조석진(趙錫晋)과 안중식(安中植)을 통하여 근대 화단으로 계승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근대 화단에서는 조선 말기의 전통 위에 일본화의 새로운 채색 사상풍을 가미한 화풍이 김은호(金殷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흐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의 영모화는 고려시대부터 독립된 화목으로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이래 각 시대 화단의 조류에 발맞추어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면서 새로운 특색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한국적 화풍 형성과 회화사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암의 「모견도(母犬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시의 「황우도(黃牛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조속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의 「국일한묘도(菊日閑猫圖)」(간송미술관 소장), 변상벽의 「묘작도(猫雀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두량의 「흑구도(黑狗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매작도(梅鵲圖)」(호암미술관 소장), 홍세섭의 「유압도(游鴨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