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 ()

김홍도필 풍속도화첩 중 씨름
김홍도필 풍속도화첩 중 씨름
회화
개념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 속화.
이칭
이칭
속화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그린 그림. 속화.
개설

좁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다룬 그림으로 한정하여 사인 풍속도(士人風俗圖)·서민 풍속도(庶民風俗圖)로 나눌 수 있다. 사인 풍속도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수렵도·계회도·시회도·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평생도 등의 주제가 유행하였다.

서민 풍속도는 일반 백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다룬 것으로, 풍속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궁중에서도 임금이 정치의 참고 자료로 삼기 위하여 서민 풍속화를 제작하였는데, 빈풍7월도(豳風七月圖), 경직도(耕織圖)가 그러한 예이다.

또한 여인들의 생활이나 자태를 그린 미인도(美人圖)도 서민 풍속도에 속한다. 미인도는 원래 궁중 여인들을 그린 사녀도(仕女圖)에서 연원한 것으로 조선 후기에는 기생을 비롯한 신분이 낮은 여인들을 화폭에 담았다.

선사시대의 풍속화

인간이 자신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행위는 선사시대부터 이루어져 왔다. 암각화나 청동기에 음각으로 새겨진 형상을 통해서 초창기의 풍속 표현을 살펴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울주대곡리암각화>를 보면, 고래·거북 등 물짐승과 호랑이·사슴·멧돼지 등의 뭍짐승을 주로 다루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사냥하는 모습, 제사장 및 무당의 모습 등의 생활 장면이 새겨져 있다. 사냥하는 장면은 한 손은 허리에 대고 한 손으로는 무기를 들어 멧돼지에게 던진다던가 두 손을 내밀어 무기를 잡아 사슴이나 족제비를 잡고 있는 자세이다. 그 움직임이 활달하지 않지만 생동감이 넘쳐 있다.

특히 머리를 감싸고 기도를 올리는 인물의 옆모습이나 신이 들린 듯 크게 과장된 사지를 쫙 벌리고 있는 인물에서는 감정의 표현과 상황의 묘사가 생생하다. 이들 형상은 뾰족한 도구로 쪼아 내어 선이나 면으로 나타내었다. 대체로 실루엣처럼 간략하게 처리하여 전체의 표상으로 동작을 표현하였다.

청동기시대의 풍속 표현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농경문청동기>(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다. 방패형 모양 청동기의 뒷면에는 농부가 따비질을 하고 곡식을 항아리에 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인물의 골격만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기하학적인 형상으로 단순화시켰으나, 인물의 동작이 분명하고 형태가 날카로우면서도 힘차다.

삼국시대의 풍속화

고구려시대에는 오늘날 알려진 수십 기의 고분 벽화를 통해서 당시 풍속화의 경향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4세기 후반에 5세기에 조성된 고분 벽화에 초상·풍속도가 유행하였다. 초상·풍속도의 내용은 묘 주인의 초상화·행차도·수렵도·생활도·투기도·문지기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장면은 주인공이 생전에 누렸던 권세의 표현으로서 내세에까지 유지하려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초상·풍속도 고분 벽화는 영화(永和) 13년(357)의 묵서명(墨書銘)이 있는 <안악3호분 安岳三號墳>이다. 이 고분에서 핵심적인 인물 풍속도는 묘 주인과 부인의 초상화이다.

묘 주인상은 서측실 서벽에 정면으로 그려졌고, 그 부인상은 같은 서측실 남벽에 주인을 향한 모습으로 배치되었다. 묘 주인상은 장막 아래 평상 위에 앉아 오른손에 털 부채를 들고 있는 형식으로 그려졌다.

동측실과 전실에는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장면,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장면, 수박(手搏)하는 장면, 방아찧는 장면, 뿔 나발을 부는 장면 등 묘 주인과 관련되는 생활 모습이 그려졌다. 409년에 조성된 <덕흥리벽화고분>은 안악3호분과 유사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표현 양식에 있어서는 보다 고구려화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이 무덤 벽화에서는 13인의 태수들이 묘 주인에게 하례하는 형식이 특이하다. 이는 묘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표현으로 해석된다. 이들 풍속 장면에는 위진 남북조시대 화풍의 영향이 짙게 남아 있다. 이후 5세기에는 초상·풍속도에서는 고구려적인 특색이 짙어지고 불교적인 소재가 증가하는 특징이 나타난다.

<약수리벽화고분>·<장천1호벽화고분>·<무용총>·<각저총>·<쌍영총>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초상·풍속도 고분이다. 묘 주인의 초상에는 부부가 함께 나란히 그려진 경우가 많아지고, 수렵 장면·씨름 장면·전투 장면·놀이 장면 등 풍속의 내용이 풍부해진다.

무용총의 수렵도를 보면, 질주하는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호랑이·사슴을 사냥하는 장면이 매우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물보다 훨씬 작게 그려진 산들조차 율동적인 띠형으로 묘사되었다.

<무용총>에서는 묘 주인 초상이 단순히 평상 위에 앉아 있는 형식화된 모습이 아니라 묘 주인이 스님을 집에 초대하여 말씀을 경청하는 생활의 한 장면으로 바뀌었다. <장천1호분>에서는 다양한 풍속 장면이 한 벽면에 그려졌다. 풍속 장면 사이에 연봉오리를 흩뿌려 불교적인 염원과 연관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 풍속도의 복식이나 양식을 보면, 고구려적인 특색이 짙게 풍긴다. 점무늬 옷, 끝단이 주름무늬인 상의, 대님을 맨 바지, 절풍의 모자 등에서 고구려의 전형적인 복식이 나타난다. 그리고 인물의 다리 부분을 사선 방향으로 배치하여 움직임을 표현하는 점 등에서 고구려 특유의 양식이 뚜렷해진다.

백제에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만한 풍속화가 발견되지 않았다. 신라시대에는 고분 벽화 및 고분 출토품이나 전 등에 그려진 공예 표현에서 당시의 풍속화풍을 엿볼 수 있다. 고분 벽화는 순흥 지역에 2기가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순흥읍내리벽화>는 문지기가 이 고분 벽화의 주제이다.

연도의 양옆에 묘사된 문지기는 무섭고 강인한 자세로 무덤을 지키고 있다. 서벽의 문지기는 양손에 뱀을 감고 입구 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이다. 매부리코, 벌려진 입, 날카롭게 솟아 있는 송곳니, 혀를 날름거리는 뱀 등 무서움을 강조하였다. 동벽의 문지기는 주먹을 가슴까지 들어 올린 상이다.

인왕상과 같은 자세에 목에서 팔로 이어지는 근육의 표현과 괴기스러운 얼굴에서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고분 출토품인 천마총에서 출토된 관의 차양 도구에 그려진 <기마인물도>(국립경주박물관 소장)에는 창을 수평으로 들고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물과 말의 비례가 짤막하여 고졸한 느낌이 든다.

굵은 필선으로 윤곽을 치고 그 내부를 백색 안료와 적색 안료로 채색하였다. 갈라진 말발굽과 말 꼬리의 표현은 <덕흥리벽화고분>·<무용총>·<매산리 사신총> 등의 수렵 장면 등 고구려 5세기 고분 벽화와 연관이 깊다. 경주시 사정동 절터에서 수습된 <수렵문전>(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은 전(塼)에 새겨진 문양이다.

말을 탄 기사가 화살 시위를 당기고 있고 사슴과 토끼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있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이 장면은 중국 감숙성(甘肅省) 가욕관시(嘉峪關市) 신성(新城) 위진묘(魏晉墓)의 전돌에 그려진 그림과 관련이 깊어 <수렵문전>이 위진시대(魏晉時代)의 벽화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의 표현이 가늘고 균일하며, 말의 머리에 콧등과 평행하게 근육의 선이 표현되고, 갈기를 선 하나하나로 표현한 점에서 수(隋)·당(唐)의 양식과의 연관성도 엿보인다.

발해시대의 풍속화

발해시대의 풍속화로는 대표적인 <정효공주묘벽화>를 보면, 전실에 무덤을 지키는 문지기 2인, 현실에 시위(侍衛)·시종·악사·내시(內侍) 등 10인의 시위상이 중심이 되고 있다. 모두 직분에 따라 검·활·철퇴·악기·봇짐·활통·화살통·구리거울 등을 가지고 있다.

즉, 무사가 대문을 지키고 시위들이 철퇴와 검을 가지고 뜰을 지키며 노복들이 둘러서서 시중을 들며 악사들이 노래와 연주로 즐겁게 하는 모습이다. 인물은 풍만한 형상으로 철선묘로 윤곽을 그리고 채색하였고, 옷에 꽃무늬까지 세세하게 표현하는 섬세한 화풍을 구사하였다.

고려시대의 풍속화

고려시대에는 풍속화가 그다지 활발하게 발달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고려 후기의 수렵도가 대표적이다. 수렵도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선사시대부터 제작된 중요한 제재이지만, 고려 후기의 수렵도는 원대 회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공민왕(恭愍王)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수렵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원래 두루마리 그림이었던 것이 누군가에 의하여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세 조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호복(胡服)의 복장에 변발(辮髮)을 한 인물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활시위을 당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필치가 매우 세밀하고 채색은 배경을 제외한 인물·말·산 등 대상에만 선명하게 베풀었다. 이제현(李齊賢)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기마도강도 騎馬渡江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대각선 구도에 각이 진 나무가 보이는 남송(南宋) 마하파(馬夏派)의 구도로 겨울철 사냥 중에 강을 건너는 장면을 담았다. 이 그림 역시 섬세한 필치가 특징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중국의 고사를 본떠서 우리의 상황에 맞게 변용한 풍속화이자 고사 인물화(故事人物畫)가 눈에 띈다. <태위공기우도 太尉公騎牛圖>는 최당(崔讜)이 공직에 봉사하다가 말년에 소를 타고 세상을 등지는 모습을 담은 사인 풍속화이다.

이 그림은 노자의 기우도를 본뜬 것으로, 도가의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을 지향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해동기로회도 海東耆老會圖>는 당나라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와 송나라 진솔회(眞率會)를 본떠서 최당·이준창(李俊昌) 등이 조직한 기로회를 그린 계회도이다. 또한 고려인이 아닌 송나라 사람이 고려의 풍속을 그린 경우도 있다.

그것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으로, 송의 사절인 서긍(徐兢)이 한 달 남짓 개성에 머물면서 고려에 대한 그의 견문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글로 남긴 책만 남아 있고,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불화에도 풍속 장면이 담겨져 있어 당시 풍속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다만 불화 중의 풍속 표현은 핵심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소재로서 그려졌다. <미륵하생경변상도 彌勒下生經變相圖>(일본 知恩院 및 親王院 소장)에는 하단에 조그맣게 배치된 밭 가는 장면과 추수하는 장면에서 풍속화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상단의 미륵삼존으로부터 하단의 풍속 장면으로 내려올수록 크기도 작아지고 표현 기법도 간략해진다.

사경이나 불경 판화의 변상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른쪽에 설법도가 그려져 있고 왼쪽에 여러 경전의 장면이 설화적 구조로 펼쳐져 있다. 여기서 왼쪽의 경전 장면 가운데 환난의 장면, 지붕 이는 장면 등 여러 풍속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 풍속 장면은 철선묘로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풍속화

조선시대에는 풍속화가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특히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풍속화가 가장 융성하게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의 풍속화를 1392년부터 16세기까지의 전기와 17세기부터 1910년까지의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전기의 풍속화

이 시기의 풍속화는 궁중 수요의 풍속화, 삼강행실도류 판화, 계회도·시회도와 같은 사인 풍속화, 서민 풍속화, 불화 속의 풍속 표현 등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다른 장르에 비하여 크게 발달하지는 않았다.

궁중 수요의 풍속화로서 주류를 이룬 것은 빈풍칠월도와 경직도이다. 빈풍칠월도는 ≪시경 詩經≫의 빈풍(豳風) 칠월편(七月篇)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402년에 제작된 것이 기록상으로 확인된다. 1424년(세종 6년)에는 세종의 지시에 의하여 조선식의 빈풍칠월도를 제작하였다.

다음으로 주목할 만한 사항은 경직도의 제작이다. 1489년(연산군 4년)에 정조사(正朝使) 권경우(權景佑)에 의하여 명나라로부터 <누숙경직도 樓璹耕織圖>를 가져온 이후 경직도의 제작이 이루어졌다. 누숙경직도는 남송대 시어잠(時於潛)의 현령(縣令)인 누숙(樓璹, 1090-1162)이 빈풍칠월도를 근간으로 제작한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밖에도 관가도(觀稼圖)·가색도(家穡圖)·농포도(農圃圖)·잠도(蠶圖) 등 경직 관계 그림들이 풍부하게 제작되었다. 다음으로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속삼강행실도 續三綱行實圖≫·≪동국신속삼강행실도 東國新續三綱行實圖≫ 등 행실도류 판화의 제작이 주목된다.

이들 판화는 궁중에서 백성들을 유교적인 덕목으로 교화시키기 위하여 제작한 고사 인물화이자 풍속화이다. 안견(安堅)이 밑그림을 그린 ≪삼강행실도≫는 한 화면에 1∼7장면의 설화의 내용을 배치하는 다원적 구성 방식을 취하였다.

선의 묘사임에도 불구하고 요(凹) 공간과 철(凸) 공간, 곡선과 직선, 밀집과 여백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절묘한 공간감을 창출하였다. 이 시기의 사인 풍속화로는 계회도와 시회도 등의 형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계회도는 16세기의 작품부터 확인된다.

<독서당계회도 讀書堂契會圖>(1541년경), <미원계회도 薇垣契會圖>(1540년),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 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1542년경) 등이 있다. 이들 작품은 상단에 계회의 표제를 적고, 중단에 계회 장면을 간략하게 표현하며, 하단에는 참석자의 인적 사항을 적은 좌목을 다는 계축(契軸)의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이들 계회도는 계회 장면이 점경 인물로 작게 표현되고 오히려 배경의 산수가 강조되었다. 그런데 1550년 이후 <호조낭관계회도 戶曹郎官契會圖>(1550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연정계회도 蓮亭契會圖>(1550년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에서는 앞의 계회도와 유사한 형식이지만 중단의 계회 장면과 산수의 배경의 비중이 대등해져 인물의 이목구비와 자세를 분명히 구별할 정도로 자세하게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1585년에 제작된 <선조조기영회도 宣祖朝耆英會圖>(서울대박물관 소장)를 보면, 아예 기영 장면만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기에 이른다.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인 계회도와 더불어 민간의 모임인 시회도(詩會圖)의 유행도 또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1499년 신말주(申末舟)가 시골 노인 아홉 사람을 모아 조직한 아회를 그린 <십노도상도 十老圖像圖>(개인 소장)가 이른 예라 할 수 있다. 1593년 조영(趙嶸)이 그린 <군산이우도 群山二友圖>(건국대학교박물관 소장), 귄필(權畢)이 자신의 초상을 그린 <사시도 思詩圖>(개인 소장) 등이 사대부의 고아한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이다.

서민 풍속화로는 기록상으로는 강희맹(姜希孟)의 <춘경도 春耕圖>가 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작품으로는 정세광(鄭世光)의 작품으로 전하는 <어렵도 漁獵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정립(尹貞立)의 <행선도 行船圖>(개인소장) 등이 있다. 이들 그림은 본격적인 풍속화라기 보다는 서민 풍속을 내용으로 하는 산수 인물화라 할 수 있다.

조선 불화의 풍속 표현은 감로도(甘露圖)에 확연하게 나타나 있다. 감로도의 상단에는 아미타여래·칠여래·인로왕보살 등의 불·보살상, 중단에는 제단과 아귀, 그 주위에 작법승중(作法僧衆)·왕후장상(王侯將相)·왕후궁녀(王后宮女) 그리고 하단에 환난 장면, 놀이 장면, 풍속 장면 등의 욕계가 묘사된다.

하단의 장면은 시대에 따라 내용·비중·이야기 전개 방법·공간감·인물 표현 양식 등이 달라진다. 즉, 이 부분이 조선시대 풍속화 양식의 지표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기에는 하단의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고 환난의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다가 후기에는 하단의 비중이 커지면서 풍속의 장면이 대폭 증가하게 된다. 또한 전기의 평면적인 공간감이 후기에는 보다 깊이 있게 전개되는 변화를 보였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

조선 후기에는 궁중 수요의 풍속화와 민간 수요의 풍속화가 함께 발달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주목되는 점은 풍속화를 속화(俗畫)라는 명칭으로 불렀던 것이다. 속화는 원래 문인화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저속한 그림이라는 뜻의 가치 개념이다.

조선 후기에는 풍속화 또는 민화를 의미하는 분류 개념으로 그 의미가 바뀐 것이다. 세종과 중종 못지 않게 경직 관계 회화에 많은 관심을 쏟은 임금이 숙종이다. 이 시기에도 경직 관계 회화에 대한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나고 중국의 경직 관계 그림이 종종 도입된다.

1681년(숙종 7년) 숙종은 홍문관(弘文館)에 병조 판서 이숙(李䎘)이 소장하고 있는 <농가사시병도 農家四時屛圖>를 이모하여 병풍으로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송(宋)휘종(徽宗)의 <경잠도 耕蠶圖>에 숙종이 어제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회화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은 청대 ≪패문재경직도 佩文齋耕織圖≫의 수용이다. 이 경직도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인 경직도에 새로운 도상과 표현 방식을 제공하여 주었다.

이 경직도는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지시에 의하여 1696년 흠천감원(欽天監員)인 초병정(焦秉貞)이 밑그림을 그리고 주규(朱圭)와 매유봉(梅裕鳳)이 새긴 것을 동판으로 찍어 책항(冊頁)으로 제작하였다.

그런데 이 ≪패문재경직도≫는 제작된 바로 다음 해인 1697년에 주청사(奏請使) 최석정(崔錫鼎) 등에 의하여 연경(燕京)으로부터 가져와 진재해(秦再奚)에 의하여 <제직도 題織圖>와 <제경도 題耕圖>가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 <제직도>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패문재경직도≫ 가운데 <세잠 재우기 三眠>, <두잠 재우기 二眠>, <누에 씻기 浴蠶>를 한 화폭에 담았는데, 좌우를 바꾸어 그렸을 뿐 거의 그대로 모사하였다. 심지어 화면 하단의 누에 씻는 장면에서 지붕 위로 나는 한 쌍의 새까지 임모할 정도이다. 인물의 묘법은 섬세하고 강한 선묘를 사용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는 궁정에서 제작된 그림 중에서는 풍속화를 의미하는 속화(俗畫)의 내용이 급증한다. 정조와 순조 때 규장각 차비대령(差備待令) 화원의 녹취재를 위한 화제를 보면, 속화가 가장 많이 출제되었다. 이것은 그만큼 궁중에서 속화의 수요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792년 4월에 제작된 <성시전도 城市全圖>가 당시 궁중에서 제작된 풍속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의 지시에 의하여 화원들이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이 그림에 관한 글을 지어 바쳤다고 하나 지금 이 그림은 전하지 않는다.

당시 전하는 시들의 내용을 보면 한양의 전경과 풍속을 화폭에 담고 있는 것으로 중국의 <청명상하도 淸明上河圖>, 일본의 <낙중낙외도 洛中洛外圖>와 유사한 대형 풍속화이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제작목적은 한편으로 태평성대를 과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경 書經≫ 무일편(無逸篇)의 고사에 따라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들의 생활상을 늘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형식의 풍속화는 19세기에 <경기감영도 京畿監營圖>(호암미술관 소장), <평양성도 平壤城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으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궁중 수요의 풍속화와 더불어 서민 풍속화가 성행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조선 후기 이전에는 고아하고 아취 있는 세계를 숭상하고 통속 세계를 푸대접한 것이 대세였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아취 세계뿐만 아니라 통속 세계까지 긍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시기에 서민 풍속화가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한 것이 이러한 인식의 변화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의 이면에는 당시 신분 사회의 동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 서민 풍속화는 윤두서(尹斗緖)와 조영석(趙榮祏) 등 사대부 화가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풍속화는 처음에 하층민 생활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노동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수준에서 출발하였다. 윤두서는 17세기 산수 인물화에서 점차적으로 풍속화의 새로운 형식을 모색하였다. <짚신삼기>(윤영선 소장)를 보면, 조선 중기 절파 화풍의 산수인물에서 등장 인물만 고사에서 농부나 일꾼으로 대체하는 정도에서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조영석에 와서 어느 정도 결실을 맺게 된다. 그는 17세기의 전통적인 공간 개념에서 탈피하여 풍속화에 걸맞는 공간을 창출한 것이다. 그도 역시 초기에는 중국의 풍속화나 화보를 본뜬 풍속화를 간간이 제작하였다. 그러나 후반에 와서는 당시 조선의 서민에 걸맞는 화풍을 창안하는 등 적극적으로 풍속화의 진흥에 힘썼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절구질>(간송미술관 소장)에서 다음과 같이 흥미 있는 성과를 거둔다. 서민들과 눈높이를 맞춘 수평 시점을 적용하여 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그리고 거듭 그은 묘법에서 서민의 정취가 물씬 풍기고 친근감을 주는 효과를 준 것이다.

사대부 화가들의 선구자적인 노력은 18세기 후반 직업 화가인 화원들에 와서 비로소 그 결실을 맺게 된다. 화원은 신분의 성격상 사대부 화가에 비하여 표현의 제약이 적어지고 무엇보다도 백성의 정서적 색채를 짙게 표현하는 데 유리하였다.

통속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 속에서 오랫동안 봉건적인 이데올로기에 억눌려 왔던 감정과 색정 등의 본능이 점차 활발하고 거리낌없이 표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여기에 김홍도(金弘道)·신윤복(申潤福)·김득신(金得臣) 등 당시 기라성 같은 화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조선 후기 풍속화는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김홍도는 풍속화에서 서민의 희로애락을 은유와 풍자로서 엮어 내어 생명감 넘치는 세계를 보여 주었다. <타작>(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을 보면, 경직 표현을 넘어선 칼날 같은 풍자가 돋보인다. 웃음을 함빡 머금고 열심히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과 웃음과 마름의 흐트러진 자세를 통해서 계급간의 불공평한 관계를 극화시켜 표현하였다.

김홍도의 뒤를 이어 화원으로서 맹활약을 한 풍속화가로는 김득신을 꼽을 수 있다. 그는 김홍도의 아류라고 평가받을 만큼 그의 화풍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돌발적인 상황 묘사나 인물의 성격 묘사에서는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는 <파적도 破寂圖>(간송미술관 소장)에서 고양이가 병아리를 물고 도망가는 소란을 화면에 도입하여 단순한 풍속 장면이 아니고 긴박한 상황을 표현하였다. 그런 가운데 화원들은 점차 경직·놀이 등의 건전한 생활상뿐만 아니라 사회의 부정적이고 어두운 부면의 제재까지 다루게 된다.

김후신(金厚臣)은 <대쾌도 大快圖>(간송미술관 소장)에서 당시 심각한 사회 문제로 여러 차례 영조가 금주령까지 내려 국가적인 차원에서 재제가 이루어진 음주 장면을 주제로 삼았다.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신윤복은 기방(妓房)의 풍속과 같은 남녀의 성정(性情)을 화폭에 과감하게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전해질 만큼 윤리상으로는 하자가 있지만, 주제의 제약을 탈피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나아가 정(情)에 상응하는 화풍을 정립하였다. 그의 풍속화는 본연의 감성에 근거를 두고 표출한 것이기에 더욱 생동감 있는 감각과 풍부한 조형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는 시선 구조를 적극 활용하여 등장 인물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아웃사이더를 설정하여 극적인 흥미를 돋우는 등 독특한 설화적 구성을 즐겨 사용하였다. <단오풍정 端午風情>(간송미술관 소장)을 보면, 바위 뒤에 훔쳐보는 2인의 승려를 설정하여 해학적으로 구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선묘와 채색, 충실한 배경 묘사 등으로 조선 후기 풍속화의 새로운 조형 세계를 펼쳐 나갔다.

19세기에는 풍속화의 제작이 더욱 활발해진다. 18세기 후반을 절정으로 작품성은 떨어지나, 대신 수요가 민간으로 저변화되고 19세기말에는 개항장 풍속화, 종교서나 교과서의 삽화 등 실용화된다. 화풍을 보면, 한편으로는 김홍도의 화풍이 유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화풍·문인화풍·민화풍 등 다양해지는 양상을 띠게 된다.

김홍도의 화풍을 계승한 작품으로는 유숙(劉淑)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대쾌도 大快圖>(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를 들 수 있다. 씨름과 택견하는 모습을 심원법으로 넓은 공간에 배치하였다. 이를 구경하는 주변의 인물들의 신분도 다양할 뿐더러 구경하는 모습도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서양화풍의 영향이 뚜렷한 풍속화로는 신광현(申光絢)의 <초구 招狗>(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있다. 이 그림은 인물·건물·나무 등에 음영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까지 표현하여 서양화의 음영법에 대한 정확한 구사를 보여 주고 있다.

조선 말에 개항하면서 개항장 풍속도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다. 개항장 풍속도란 원산, 제물포, 초량의 개항장에서 조선의 갖가지 풍속을 그려 외국 상인이나 선교사에게 판매한 것이다. 김준근(金俊根, 19세기 후반에 활동)이 그린 기산풍속도(箕山風俗圖)가 대표적인 개항장 풍속도이다.

이 풍속도는 현재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에 여러 점이 소장되어 있다. 조선의 풍속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조선의 멸망으로 그 맥이 끊긴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도 동양화나 서양화의 매체를 통해서 꾸준히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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