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문신(門神)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 문배는 통일신라시대의 <처용가 處容歌>(處容門排)에서 유래한다. 신라 헌강왕이 용을 위해 사찰을 건립하자 용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일곱 아들로 하여금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중 한 아들인 처용은 임금을 따라 서울에 와서 아름다운 아내와 관직을 얻었다. 그런데 역신이 처용의 아내를 사모하여 그녀와 관계를 맺었는데, 처용이 넓은 도량으로 대하자 이에 감복하고 처용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처용그림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것은 당나라 때 종규(鐘 )에 버금가는 문배이다.
조선시대에는 문배의 제재가 보다 많아지는데, 성현의 ≪용재총화 齋叢話≫를 보면, “이른 새벽에는 그림을 대문간에 붙이는데, 그림에는 처용·각귀(角鬼)·종규·복두관인·개주장군·경지보부인·닭그림과 호랑이그림 따위였다.”고 하였다. 처용이 가장 먼저 언급된 점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처용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전하는 문배로는 용호문배도(龍虎門排圖)가 가장 많다. 이 문배는 문 한쪽에는 호랑이 그림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는 용을 붙여 짝을 이루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호랑이는 삼재를 瀲아내는 벽사의 기능을 하고, 용은 오복을 가져다주는 길상의 기능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처용이 벽사의 기능만을 한다면 용호문배도는 벽사의 기능에 길상의 기능까지 겸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의 용호문배도 가운데 호랑이그림은 까치와 호랑이가 함께 등장하는 까치호랑이로 그려지는 것이 특색이다. 이 그림은 민초와 같이 힘없는 계층을 대변하는 까치가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탐관오리와 같은 호랑이를 통쾌하게 농락을 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벽사의 기능에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설화를 덧붙여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