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민들이 제사를 지낸 방식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한 제사 그림을 용도별로 분류하면, 원당도(願堂圖), 사당도(祠堂圖), 영위도(靈位圖)로 나눌 수 있다. 원당도는 사찰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물인 원당을 그린 것이다. 조선은 유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반까지 불교적인 전통의 영향을 받아 원당도를 그려 놓고 제사를 지낸 흔적이 있다. 원당도에는 원당 안에 전패나 불상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걸맞은 제사 그림은 유교의 제사 공간인 사당을 그려 놓은 사당도이다. 사당도는 감모여재도라고도 부른다. 감모여재(感慕如在)란 ‘조상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그 분들이 살아 계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이다. 이 그림은 대개 지방 제사를 위해 지방을 붙일 수 있는 위패가 그려져 있다. 영위도는 사당 안에 교의(交椅)와 신주를 중점적으로 그린 그림을 가리킨다. 공자는 『논어』에서 제사에 직접 참여하지 못해 다른 사람이 대행하게 하는 것은 차라리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정성이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서라도 직접 제사를 지내야 하니, 원행(遠行)에는 감모여재도만큼 긴요한 물건도 없었다.
원래 제사는 별도로 세운 사당에서 지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사당은 가묘(家廟) 혹은 제실(祭室)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규모는 신분에 따라 달랐다. 천자는 7묘로 하고,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 사(士)는 1묘, 서인은 침(寢)에서 제사해야 한다고 『예기』에 기록되어 있다. 서인은 사당에서 신주를 따로 모실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방을 쓰는 지방 제사를 드린 것이다. 감모여재도에 그려진 위패에 지방을 붙인 자국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감모여재도는 유교의 제사를 서민들에게 널리 퍼지게 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유교식 제사를 보여 주는 감모여재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유교가 백성들의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든 것은 이 무렵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백성들의 생활을 유교식으로 바꾸는 데 무려 500년 가까운 세월이 소요된 것이다. 그만큼 서민들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 가회민화박물관 소장 「감모여재도」는 화병과 같은 불교적인 요소가 남아 있기는 하여도 지방을 붙여 제사를 지내던 유교식 사당도이다. 사당 양쪽에 놓인 과일을 꽂은 화병은 불화인 감로도에서 볼 수 있는 불교식 제사 용품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화병에 꽂혀 있는 유자와 석류가 풍만하게 표현되었다. 이처럼 과장하고 강조한 것은 이들 과일이 갖고 있는 다남 다산이란 상징성을 강조하기 위한 고려로 보인다. 전체의 틀은 매우 정연하고 형식적이지만, 처마 끝의 장식을 감각적으로 처리하고 양쪽 화병에 있는 과일을 풍만하고 과장되게 표현한 점에서 소박하면서 상징적인 민화의 매력을 엿볼 수 있다.
사당도는 족자와 병풍으로 제작되었다. 족자는 얼마든지 휴대가 가능하고, 병풍은 집에 두고 치는 대병(大屛)도 있지만 갖고 다닐 수 있는 소병(小屛)도 있었다. 일본 민예관(民藝館)에 소장된 「감모여재도」는 족자 형태다. 그림은 활기와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팔작지붕(삼각형의 벽이 있는 기와지붕)의 처마는 위로 슬쩍 올라가 있고 문짝도 시원하게 들려 있다. 제사상은 위에서 바라보는 듯 거의 평면으로 전개되어 있는데, 위패를 중심으로 위아래 공간이 널찍하게 열려 있다. 여기에 과일과 술잔 등을 넉넉하게 배치하고, 좌우에는 모란꽃병까지 놓는 여유가 보인다. 상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지만, 기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앞쪽에 있다. 그래서 상은 상대로, 기물은 기물대로 그 특징이 잘 드러난다. 서양식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많은 물상들을 넉넉하게 배치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 민화만이 갖고 있는, 자유롭고 융통성 있는 시점이다. 더구나 사당의 양쪽 벽에는 패랭이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엄격한 제사 의식 속에서도 친근함과 다정함이 엿보이게 하는 파격이다.
그런데 제수로 쓰인 음식은 일반 제사상에 놓이는 포 · 생선 · 나물 · 곶감 · 밤은 보이지 않고, 수박 · 참외 · 석류 · 유자 · 포도가 주류를 이룬다. 이들은 모두 다산 · 장수 · 행복을 기원하는 길상의 상징이다. 여기서 우리는 조상께 경배하면서 제수를 통해 자신들의 행복도 함께 기원하는 후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위한 제사인 것이다.
감모여재도의 형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전각에 담장까지 둘러쳐져 있는 담장 전각형, 전각만을 중점적으로 그린 전각형, 전각에 제단이 차려져 있는 전각 제단형이다. 또한 19세기 말∼20세기 초에는 감모여재도와 화조화, 감모여재도와 산수화 등 다른 제재와 조합하는 형식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감모여재도는 19세기 이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제사 그림 가운데 유일하게 제작 연도를 알 수 있는 유물이 1811년에 제작된 미국 브루클린미술관 소장 「감모여재도」이다. 제목은 감모여재도이지만, 실제 내용은 불교식 제사를 지내기 위한 그림인 원당도이다. 불전에 불교식 제단을 그린 것으로, 망자에 대한 추선공양(追善供養)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제사를 지내는 전각을 중심으로 그린 형식은 이후 유행한 감모여재도에 영향을 미쳐 서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유사하다.
19세기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감모여재도가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비교적 제작 시기가 이른 예로는 일본 민예관 소장 「감모여재도」, 일본 고려미술관(高麗美術館) 소장 「감모여재도」를 꼽을 수 있고, 이 밖에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가회민화박물관, 조선민화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감모여재도는 서민들의 제사 양상을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서민들은 제사에서 불교적인 전통성을 유지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다. 유교 제사 그림인 감모여재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중엽 이후인데, 민화의 유행이 서민 제사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사당 대신에 족자나 병풍으로 제작된 사당 그림을 펼쳐 놓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서민 제사의 한 방향을 잡아 나갔다. 아울러 감모여재도는 유교 정통의 제수 대신 길상적인 상징이 강한 제수를 그려 넣음으로써 행복을 바라는 현실적인 염원을 투영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감모여재도는 민화식이라 할 수 있는 전통적인 평면적인 구성에 유교의 덕목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채색으로 표현되어 새로운 서민의 제사 문화를 이루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