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함(子涵), 호는 허주(虛舟). 16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인 이경윤(李慶胤)의 서자(庶子)이다. 화원으로 벼슬은 주부를 지냈다. 1609년 원접사(遠接使)의 수행 화원으로 동행하였으며, 1623년 위항 문인 유희경(劉希慶)의 요청에 의하여 그의 별서(別墅)를 묘사한 실경산수화 「임장도(林莊圖)」를 그렸다. 1628년태조의 진영(眞影)을 개수한 공으로 동반(東班)의 6품직을 제수 받았다. 1627년「소현세자가례반차도(昭顯世子嘉禮班次圖)」를, 1638년「인조장렬후가례반차도(仁祖莊烈后嘉禮班次圖)」를 제작하는 데 이기룡(李起龍)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만년에는 1645년 소현세자를 따라 조선에 왔다가 3년간 머물고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孟永光)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허균(許筠)은 그를 가리켜,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배워서 화가가 되었고, 산수, 인물, 영모(翎毛), 초충(草蟲)에 모두 능하며, 이정(李楨)사망 후의 “본국제일수(本國第一手)”라고 하는 등 당시에 가장 뛰어난 기량의 소유자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숙종 연간의 남태응(南泰膺)은 “각체(各體)를 모두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대가였다. 그러나 고법(古法)을 넓게 구사하되 웅혼한 맛이 없고 정밀하나 오묘하지 못하며 기교에 능하되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평한 바 있다.
이징은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으나 이 중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은 「난죽도(蘭竹圖)」(1635)와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1643)이다. 「화개현구장도」는 정여창(鄭汝昌)의 구장(舊莊 : 옛 별장)을 그린 것으로 실제 눈으로 보고 그린 실경산수화는 아니다.
산수화에서는 조선 초기의 안견파(安堅派)와 중기 절파계(浙派系)를 융합한 화풍을 즐겨 구사하였지만, 안견파 화풍에 더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다. 그리고 수묵 산수화와 함께 장식적인 취향이 짙은 이금산수화(泥金山水畵 : 금가루를 풀어 만든 물감)도 잘 그려 이 방면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다.
영모화에서는 절파풍의 묵법(墨法)을 토대로 간일하게 도안화되었으면서도 서정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소, 말, 기러기, 원앙새 등을 많이 그리고, 이 분야의 한국적 화풍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표작으로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이금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노안도(蘆雁圖)」(개인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