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수길(秀吉), 호는 낙파(駱坡), 낙촌(駱村) 또는 학록(鶴麓). 증조부는 성종(成宗)의 8남인 익양군(益陽君)이회(李懷), 할아버지는 용천군(龍川君)이수한(李壽鷴), 아버지는 청성군(淸城君)이걸(李傑)이다.
서화에 능하였고 동생 이영윤(李英胤)과 두 아들 그리고 서자인 이징(李澄) 모두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다. 학림수(鶴林守)를 제수받았고 뒤에 학림정(鶴林正)에 봉해졌다. 중국에 사절로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는 왕의 서행(西幸)을 보좌하지 않고 산속으로 피신하였다고 하여 사헌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30년 연상인 절파(浙派)의 대가 김시(金禔)와 친밀하게 교유하면서 회화적 영향을 받았다.
남태응(南泰膺)은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그의 그림이 고담(枯淡: 글이나 그림 따위의 표현이 꾸밈이 없고 담담함)한 가운데 정취가 있고 거칠고 성근 맛이 없어 “김시와 비교해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평하였었다. 윤두서(尹斗緖)는 그의 그림에 대하여 강하고 굳고 우아하고 깨끗하나 협소함이 한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그림들은 대체로 산수를 배경으로 인물을 비중있게 그린 소경(小景) 산수인물화 및 동물화이다. 모두 조선 중기 절파 화풍의 특징을 보여 준다. 최립(崔岦)의 발문과 찬시(贊詩)가 있는 『인물화첩』(호림미술관 소장)이 그의 진작으로 가장 신빙도가 높다. 1996년 일본으로부터 반환된 데라우치[寺內] 문고의 『낙파필희(駱坡筆戱)』 또한 이경윤의 작품이다.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산수도」, 「탁족도(濯足圖)」 등이 그의 대표적인 전칭작이다.
동물화에서는 흑백 대비의 묵법(墨法)이 강조되고 한국적인 정취가 넘치는 말과 소와 개 그림을 즐겨 그렸다. 간송미술관에 유작들이 다소 전한다. 김시와 함께 절파 화풍의 정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16세기 후반의 조선 화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