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초호는 홍월헌(弘月軒). 김응리(金應履)의 아들이며,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이다. 화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한중흥(韓重興)의 외손자이다.
개성 김씨 가문은 김응환때부터 도화서 화원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명문 화원 가문을 이루었다. 따라서 김득신 집안의 구성원은 화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김득신은 화사군관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를 지냈고 동생인 김석신(金碩臣), 김양신(金良臣), 그리고 아들인 김건종(金建鍾), 김수종(金秀鍾), 김하종(金夏鍾)이 모두 화원이었다.
김득신은 활약상에 비해 기록이 적으며 생애도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근역서화징』에는 김득신의 생년이 175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부친 김응리의 생년과 11년, 김응환과는 12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의 생몰년에는 의문이 남는다.
김득신은 흔히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만 이야기되어 왔으나 그의 회화적 기량은 조선 후기 도화서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의 화풍을 보면 초기에는 김응환을 통해 집안의 화풍을 계승하였고, 이후에는 김홍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 영모(翎毛) 등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풍속화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 영향을 보인다. 그는 김홍도의 후기 풍속화풍을 계승하는 동시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한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와 정서를 더욱 가미하여 풍속화에서 김홍도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하였다.
김득신은 1772년『육상궁시호도감의궤(毓祥宮諡號都監儀軌)』부터 의궤에 이름이 나타난다. 이때 나이는 18세로서 이후 꾸준히 의궤에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 1791년 정조어진의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리는 데에 이명기(李命基), 김홍도(金弘道), 신한평(申漢坪)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또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같은 공필(工筆)의 고사도(故事圖)를 남기고 있어 다양한 화풍을 구사한 화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파적도(破寂圖)」(간송미술관 소장), 「긍재풍속화첩」(간송미술관 소장), 「귀시도(歸市圖)」(개인 소장),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개인 소장), 「풍속팔곡병(風俗八曲屛)」(삼성미술관 리움), 「신선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