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조화는 꽃과 새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이다. 동양화에서 산수와 인물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고려 시대 때 본격적으로 대두된 이후 조선 시대에 널리 성행했다. 화조화는 조선 시대 화원들이 즐겨 그린 소재였으며 화원의 특별채용시험에 채택되었다. 조선 시대 즐겨 그려진 새로는 까치·독수리·꿩·참새·원앙새·물오리·메추리 등이 있다. 길짐승으로는 개·고양이·원숭이·호랑이 등과 상상적인 동물인 용이 있다. 이들 동물들은 파초, 국화, 꽃 등을 배경으로 그려졌다. 18세기 이후 강세황, 김홍도, 장승업, 김정희 등의 화조화가 유명하다.
넓은 의미로는 조류만이 아닌 네 발 달린 짐승 등 동물 전체를 포함해 일컫는다. 한편 영모(翎毛)란 새깃[翎]과 짐승털[毛]의 의미로, 날짐승과 길짐승을 가리킨다.
그러나 북송대(北宋代)까지만 해도 영모화는 새와 동물을 포괄하는 그림의 개념으로 쓰인 경우는 드물었으며, 오히려 화조문(花鳥門)의 한 지류(支流)로 간주된 듯 주로 새 그림을 지칭했다. 청(淸)때 간행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제11권 「영모화훼보(翎毛花卉譜)」에서도 길짐승은 제외되고 새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영모의 뜻이 원래 글자 뜻대로 해석되어 오늘날에는 새와 짐승의 그림으로 이해되고 있다. 새와 짐승은 인간과 더불어 자연 속에서 서식하는 동반자로서 아름다운 외모와 듣기 좋은 울음소리 등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림의 주된 소재의 한 분야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동양회화권에서 산수(山水)와 인물(人物)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여 왔다. 우리나라의 화조화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화조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고려시대 때 본격적으로 대두된 이후, 조선시대에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짐승이 묘사되기 시작했던 것은 매우 오래 전의 일로, 청동기나 반구대암각화(盤龜臺岩刻畵)등에 선각(線刻)된 문양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있다. 본격적인 그림에서 동물이 주인공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나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이를테면 만주 길림성 지방에 위치한 무용총의 수렵도나 평안남도 용강에 있는 매산리 사신총 등의 사냥장면을 통해 어엿한 말이나 호랑이 및 개, 그리고 각종 새의 그림을 살필 수 있다.
또한 고구려벽화 중에서는 후기 벽화에서 주로 그려졌던 사신도(四神圖)가 특기할 만하다. 4신 즉 청룡 · 백호 · 주작 · 현무 등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긴 하지만 동적인 세련된 필치에서 이 분야 그림의 수준 및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연꽃을 위시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식물들도 등장한다. 신라나 백제는 현존하는 그림이 더욱 희귀하지만 「천마도(天馬圖)」나 칠기편의 「우마도(牛馬圖)」 및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 등 각종 동물형태의 토기 및 토우(土偶)를 통해 어느 정도 그 양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는 무덤 주위를 에워싼 12지(支)의 석조각 동물은 그 중 두드러진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선사시대의 선각화나 먹과 채색을 곁들여 묘사된 삼국시대의 고분벽화들 모두가 하나의 독립된 화목(畵目)으로 그려진 순수한 감상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술적이고 장식적이며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모화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상 동양회화권에서 보다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중국에서도 영모화의 기틀이 잡히고, 전통이 형성된 시기는 당대말기(唐代末期)에서 오대(五代)무렵이었으며, 송대에 이르러서야 널리 유행되었다. 특히 송대의 영모화는 원 · 명 · 청대(元明淸代) 중국 영모화의 근간을 이루면서, 고려시대 영모화의 발전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고려시대의 화조화는 송을 비롯한 중국 역대왕조 화조화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토대로 나름대로의 발전을 모색했던 것으로 믿어지지만, 자료의 부족으로 구체적인 양상에 대한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다.
당시 화조화가 크게 발달한 송(宋)과의 유대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그 영향이 있었으리라 보여진다. 비록 그림이 현존되진 않으나 문헌상에 이들 화조화에 부친 제시(題詩) 등이 있어 화조화 이해에 간접적인 자료가 된다.
그러한 일면은 평면에 전개된 그림은 아니지만 회화적인 요소가 짙은 음각(陰刻)이나 상감기법(象嵌技法)으로 된 청자나 금속기의 문양중에서 학이나, 갯버들과 물풀 사이에서 노니는 수경 중의 물오리나 원앙의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고려 말이긴 하나 불화의 세부에서 공작이나 학 및 소나 말 등이 등장되며,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수렵도」나 「양도(羊圖)」등의 잔결을 통해 고려왕조 동물그림의 일면모를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있어 영모화는 다른 분야의 회화와 더불어 문인화가와 도화서의 화원들에 의해 즐겨 그려진 소재였을 뿐 아니라, 화원의 시취(試取, 특별채용시험)에 인물과 함께 삼등과목(三等科目)으로 채택되는 등 그 위치가 확고해졌다.
이러한 화조화는 무엇보다 조선시대를 통해 줄곧 한국적인 화풍형성에 크게 기여한 점에서 회화사적 주목이 더욱 요망된다. 조선시대 영모화의 변천과정을 일반적인 회화사의 시대구분법인 4기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초기(1392∼약1550)의 영모화도 다른 분야의 회화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전통의 계승과 명대(明代)화풍의 수용 등을 통하여 새로운 면모를 보이게 된다. 이 시기 영모화의 발전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명대 화풍의 유입은 주로 양국간의 사행(使行)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영모화에 관한 자료 또한 전하는 예가 매우 드물어 그 이해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 조선 초기 영모화를 특기로 했던 유자미(柳自湄)의 「지곡송학도(芝谷松鶴圖)」, 김정(金淨, 1482∼1522)의 「산초백두도(山椒白頭圖)」, 고운(高雲, 1495∼?)의 「호랑이」, 이암(李巖, 1499∼?)의 「모견도(母犬圖)」 등 일련의 개그림,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패하백로(敗荷白鷺)」 등의 현존작들을 들 수 있다.
현존하는 조선 초기의 영모화들은 대체로 대경식(大景式) 구도에 비교적 정교한 필법과 화려한 설채(設彩)를 특징으로 하는 원체풍(院體風)과 특히 선비화가에 의해 소경(小景)의 간결한 구도에 수묵(水墨)위주로 다루어진 두 가지의 경향을 띠고 있다.
조선 중기(약 1550 ∼ 약 1700)는 어느 때보다도 영모를 특기로 하는 화가의 배출이 제일 많았고. 또한 이 분야에 있어서 한국적 화풍의 특색이 가장 잘 발휘되었던 시기이다. 조선 초기에 이미 대두된 수묵 위주의 화풍을 계승하면서 새롭게 절파계화풍(浙派系畵風)을 받아들여 이 분야 특유의 색다른 한국적 화풍을 개척하였던 것이다.
조선 중기 영모화에 뛰어난 화가로는 『화원별집(畵苑別集)』 내에 「영모(翎毛)」를 남긴 신세림(申世霖, 1521∼1583), 김시(金禔, 1524∼1593), 김식(金埴, 1579∼1662), 이경윤(李慶胤 1545∼1611), 이영윤(李英胤 1561∼?), 이징(李澄, 1581∼1674 이후), 조속(趙涑, 1595∼1668), 조지운(趙之耘, 1637∼?)등이 있다.
이 시기는 선비들에 위해 네 계절에 수묵 위주로 새들을 등장시킨 사계영모도(四季翎毛圖) 등이 크게 유행하여 전래된 화첩(畵帖)이나 소폭(小幅)의 그림들도 상당 수에 이른다.
조선 후기(약 1700 ∼ 약 1850)의 영모화는 진경산수의 발달과 서양화법의 유입 등에 힘입어 예리한 관찰과 사생력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 경향이 정선(鄭敾, 1676∼1759)과, 「고양이와 닭그림」의 변상벽(卞相璧, 1730∼?), 「개그림」의 김두량(金斗樑, 1696∼1763)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각자의 개성을 나타냈던 또 하나의 경향이 심사정(沈師正 1707∼1769)과 이인문(李寅文, 1745∼1824 이후)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시기는 마치 조선 중기 화단에 있어 선비화가들 대나무의 이정(李霆, 1541∼1626), 매화의 어몽룡(魚夢龍, 1566∼?) 등 사군자(四君子) 분야에서 그리고 포도의 황집중(黃執中, 1533∼1593 이후), 까치의 조속처럼 한 가지 소재에 능해 일정형(一定型)을 이룩하여 명성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술한 화가 외에도 호랑이의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매의 정홍래(鄭弘來, 1720∼?), 메추리의 최북(崔北, 1712∼1786 경), 나비엔 19세기 말까지 활동한 남계우(南啓宇, 1811∼1888) 등 한 가지 소재로 이름을 얻은 직업화가들이 다수 등장케 된다.
조선 말기(약 1850 ∼ 1910)에 이르러 영모화는 화단의 전반적인 침체현상에 따라 전대(前代)의 성행에는 미치지 못했던 듯하다. 조선시대 회화의 마지막 꽃을 피운 화가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날짐승뿐 아니라 길짐승까지 함께 등장시킨 연폭의 병풍들에서 화조화의 기량을 엿볼 수 있으며, 대표작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8폭영모병이 보여주듯 참신한 기법으로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한 홍세섭(洪世燮, 1832∼1884)을 들 수 있다.
아울러 양기훈(楊基薰, 1843∼?)은 기러기[蘆雁] 그림으로 이름을 얻었다. 이 시기에도 직업화가에 의해 그리고 민화(民畵)의 범주에 있어 매우 화사하고 장식적인 동물 그림들도 그려졌다.
화조화에 있어서 조선시대에 즐겨 그려진 동물 소재 가운데, 먼저 새로는 까치 · 매 · 독수리 · 학 · 꿩 · 참새 · 닭 · 원앙새 · 물오리 · 백로를 포함한 물새들, 딱따구리 · 메추리 등이 빈번하게 등장된다. 길짐승에 있어서는 가축인 소 · 말 · 개 · 고양이 · 양 · 염소 외에 원숭이 · 호랑이 · 그리고 상상적인 동물인 용들이 그려졌다.
학은 고려청자의 주된 문양이었는데 오늘날엔 고려시대 그림으로 보이는 개인소장의 「학과 신선」이 전래되고 있다. 15세기에는 선비화가 유자미의 「지곡송학도(芝谷松鶴圖)」나 이종준(李宗準, ?∼1499)의 전칭작품이 두드러진다. 특히 소나무를 배경으로 한 학의 경우 서상적(瑞祥的)인 성격으로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어 민화(民畵)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까치는 비교적 여러 화가의 그림이 알려져 있는데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희조(喜鳥)로 여겨 즐겨 그려오던 터였다. 이 분야에서 조속은 일찍 이름을 얻었으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조작도(朝鵲圖)」나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작도(梅鵲圖)」 같은 명품을 남기고 있으며 그의 아들 조지운을 비롯해 조영석 · 심사정 · 홍세섭 등 사대부 화가와 김홍도 등 다수의 화원들에 의해서도 주소재가 되고 있다.
매와 독수리는 15세기 작자 미상의 그림도 전래되는데, 그 가운데서도 정홍래(鄭弘來, 1720∼?)는 특히 발군의 실력을 보인 작가이다. 그 밖에 토끼나 꿩을 노리는 매를 소재로 한 그림 또한 조선 중기 그림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심사정, 최북, 신윤복(申潤福, 1758∼1813 이후) 등 다수 전해진다. 딱따구리 그림에서는 종실(宗室)의 이요(李㴭, 1622∼1658) 및 심사정의 그림이 유명하다.
주변에서 늘 대할 수 있는 닭은 초상화나 고양이 그림으로 크게 명성을 얻었던 변상벽이 어미닭 주변에 모여든 병아리를 그린 걸작을 남기고 있으며, 정선이나 신윤복, 장승업 등의 명품도 알려져 있다.
말은 인류가 남긴 동물 그림 중에서 가장 일찍부터 그려진 소재로서 이는 이들 동물이 인류문명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데 기인된 것이라 구석기시대의 알타미라 동굴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천마도」나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렵장면, 또 당당한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를 통해 이미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말그림을 살필 수 있다.
중국에서도 당나라 이후로 말 한 가지 분야만으로 화마대사(畵馬大師)라는 별칭을 얻은 이가 여럿 있으니 얼마나 번성하였는지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조선시대에는 중기화단의 이경윤을 비롯해 윤두서(尹斗緖, 1668∼1715)와 윤덕희(尹德熙, 1685∼1766)부자가 소그림과 함께 말그림에 큰 명성을 얻었으며 명품(名品)들을 남기고 있다.
교통수단으로서의 말과 농경민족의 농우(農牛)는 인간에게 대단히 소중한 존재였는데 말에 못지않게 소그림을 통해 가전화풍(家傳畵風)의 독특한 경지를 이룬 사대부 화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수우(水牛)이긴 하지만 화본(畵本)풍에서 벗어나 독특한 양식을 이룩한 점을 높이 평가받고 있는 선비화가 이경윤 및 김시와 그의 손자 김식이다.
이들의 화풍은 윤두서 등에 이어지며 이를 따르는 화가군(群)이 출현하였다. 이들의 특징을 보면 마치 안경을 낀 듯한 둥근 눈, ×자형으로 된 코, 비교적 살찐 몸통, 등선의 점선 등이 특징이 된다.
김두량에 이르면 「목동오수(牧童午睡)」와 같은 풍속적인 성격이 짙은 그림을 통해 실제 우리나라 소를 사실적인 기법으로 화면에 옮긴 생생한 그림들을 대면케 된다. 조영석이나 김홍도 등 풍속화에 등장한 소들은 이 계열이며 한편 도석인물(道釋人物)에 신선과 더불어 등장한 소들도 눈에 띤다.
개 그림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보이지만 조선시대 일반 그림에서도 그 소재로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조선 초 궁정취향을 반영하는 종실출신 이암은 「모견도」를 비롯해 개와 고양이를 소재로 한 몇 폭의 그림들을 남기고 있어 16세기 화풍을 대변한다.
화조를 배경으로 강아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 이 그림들은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사함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잘 알려진 「모견도」는 다소 거친 표현이 보이기도 하지만 성근 나무들 뒷배경으로 해서 그 아래 어미개의 품에 안겨 젖을 빠는 새끼들이 정감 어린 분위기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야말로 작품이 주는 서정성 외에 구도나 그 묘사법에 있어 독특한 면이 보인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 그림과 크게 구별되는 한국적인 정취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나무를 배경으로 그 아래 개가 등장하는 구도는 후대에 이어져 이경윤의 「긁는 개」는 특히 작품이름이 같은 김두량의 그림과 연결된다.
김두량의 「긁는 개」는 소폭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필치로 터럭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묘사해 마치 서양의 정밀소묘와 흡사한 느낌을 주며 이 점에서 서양화법(西洋畵法)과의 관련을 시사하기도 한다.
필치의 차이가 있으나 구도나 개의 자세는 이경윤과 공통점이 크다. 김두량은 그밖에도 영조임금이 직접 제발을 쓴 개 그림 「삽살개」를 비롯 몇 폭의 출중한 작품이 전래되고 있어 이 분야에서 점하는 위치가 단연 돋보인다.
천주교 신자로 성화(聖畵)를 그린 바 있는 순교자 이희영(李喜英, ? ∼1801)도 이 방면의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서양화풍의 유입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밖에 김홍도나 신윤복도 개의 그림을 남기고 있고, 한때 김홍도의 그림이라 지칭된 바 있는 「맹견도」는 비록 작자미상이긴 하지만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작품이다.
이 외에 백은배(白殷培, 1820 ∼1900 이후)나 장승업 등의 개그림이 전래된다. 개만이 주인공은 아니나 풍속화에 있어서도 화면 한 모퉁이 개가 빈번히 등장된다.
호랑이그림은 최근 만화 가운데 까치호랑이그림〔鵲虎圖〕이 일반에게 알려지면서 마치 호랑이그림이 민화의 주류를 이루는 듯이 보일 우려가 높아졌다. 그러나 호랑이그림은 민화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조선 초부터 영모화의 중요한 소재로 널리 그려졌다.
또한 이것은 매년 벽사(辟邪)의 바람에서 그려지던 세화(歲畵)의 주류를 이루기도 했다. 그림의 시원은 고구려벽화의 사냥장면이나 사신도중의 백호(白虎)까지 소급될 수 있고 불교와 연관해서는 산신탱(山神幀)으로도 그려졌다. 고운의 대소 두 폭의 호랑이그림은 남아 있는 그림이 드문 16세기 호랑이 그림의 면모를 보여 준다.
이 중 큰 그림은 후대 호랑이 그림의 교본역할을 하는데 비해 작품 자체의 가치와 신빙성은 작은 그림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18세기 정홍래는 매그림과 더불어 호랑이 그림에도 기량이 뛰어났으며 일명화가(逸名畵家)인 홍호(洪虎)도 이 분야에 특출한 화가로 전해진다.
18세기 이후는 선비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화원 김홍도의 합작그림 외에 이의양(李義養, 1768∼?)과 19세기엔 유숙(劉淑, 1827∼1873)도 이 분야에 작품을 남기고 있다.
민화의 한 분야로서의 호랑이그림은 작품수만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내용에 있어서는 익살스럽고 다소 바보스러운 표정에, 표현에 있어서 생략과 강조가 두드러져 현대감각이 강하게 드는 점들로 해서 주목된다. 허나 화격에 있어서는 전술한 화가들의 그림들과는 구별된다.
고양이 역시 생소하지 않은 영모화의 소재가 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송(宋) 이래로 깜찍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그리거나 어린이를 함께 나타내 마냥 부드러운 분위기로 묘사하기도 했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채색을 사용하지 않고 수묵(水墨)을 위주로 해서 빠른 필치로 간략화하는 면을 보인다.
고양이 그림으로 조선시대 전체를 통해 첫번째로 꼽히는 화가는 변고양(卞古羊)이란 별명을 얻은 변상벽이다. 고양이 그림하면 그가 떠오를 만큼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인 기법의 고양이그림을 다수 남기고 있는데 고양이의 생리와 특징을 능숙한 필치로 원숙하게 나타낸 점이 특이하다.
그의 고양이들은 결코 화본을 통해 그림 연습을 한 데서는 나올 수 없는 자태들이다. 그는 1763, 1773년 양차에 걸쳐 영조임금의 초상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방법도 동물 그림에서 보이듯 고도의 정밀성과 더불어 동물의 순간적인 작태를 잘 포착하여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구성,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묘작도(猫雀圖)」는 그의 대표작이자 고양이그림의 정수로 손꼽히는데, 나무위를 오르는 모양과 땅에서 이를 바라다보는 모양의 한쌍의 고양이들의 부산한 동작을 중심으로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고양이 그림으로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불해(李不害, 1529∼?)의 전칭 「고양이와 참새」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그림은 뛰어난 솜씨이나 과연 그가 그린 것인지는 세밀한 조사를 요한다.
심사정은 파초를 배경으로 풀벌레를 노리는 오똑한 자세의 고양이 그림을 남기고 있는데, 파초를 배경으로 한 예는 중국 명(明)의 대진(戴進, 1388∼1462)의 그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정선도 보라색 국화를 배경으로 검은 고양이를 그린 것이 있고 이 밖에 남계우는 화사한 꽃을 배경으로, 장승업은 다양한 소재의 작품 가운데 고양이그림도 남겼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과는 차이가 크나 문인화가로서 외형 그대로 옮기는 형사(形似)는 아니나 고양이의 특징을 잘 드러낸 간결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명품(名品)도 알려져 있다.
실경산수나 풍속화 등에 잘 나타나 있는 한국적인 정취를 화조화 또한 예외 없이 드러내 중국과 엄연히 구별되며 조선시대 그림의 개성과 우수성을 어엿하게 보여준다. 한자문화권에 있어 우리나라가 이룩한 문화의 독자성과 개성은 한 폭의 동물 그림을 통해서도 뚜렷하게 확인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