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안동 출신. 이만실(李蔓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헌 이승직(李繩直)이고, 아버지는 이시민(李時敏)이며, 어머니는 현감 권계경(權啓經)의 딸이다. 동생은 이홍준(李弘準)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5년(성종 16)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에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 헐뜯고 농간함)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있고, 의서로는 『산림경제(山林經濟)』등에 인용된 『신선태을자금단방(神仙太乙紫金丹方)』이 있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