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아버지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이다. 아들은 윤계동(尹季童)이며, 홍여방(洪汝方)의 매부이다.
고려 우왕 때 생원으로서 박초(朴礎) 등과 같이 불교 망국론을 역설하고 유학을 권장하라고 주장하였다.
1404년(태종 4)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로 복직되었으나, 남재(南在)의 부정 사실을 탄핵하려다 오히려 공주로 귀양갔다. 1405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1406년 왜적이 침입하자 경차관(敬差官)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1407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다시 한성부윤으로 옮겼다가 곧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고, 1409년 상평보(常平寶)의 설치를 건의해 시행하게 하였다. 참지의정사(參知議政事)를 거쳐, 1410년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 겸 계림부윤으로 임명되었다.
한 때 윤향의 조카가 윤목(尹穆)의 죄에 연좌된 탓에 중요 관직에 임용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윤향이 먼저 윤목의 죄를 고발했기 때문에 태종이 중요 관직에 임명시켰다. 1412년 한성부윤을 거쳐 참지의정부사에 다시 임명되었다.
1413년 공조판서로 발탁되고, 1415년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 공신들을 ‘자기 임금을 배신하고 한고조(漢高祖)를 도운 정공(丁公)의 일’에 비유해 논하고, 또 그들의 전지(田地)를 회수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어, 적성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참찬을 거쳐 강원도·경상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곧 형조판서로 다시 발탁되었다. 1408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전라도관찰사 재직 당시 전주부에 속하지 않던 현(縣)·향(鄕)·소(所)·부곡(部曲) 등을 전주부에 합치시켜놓았다. 시호는 소도(昭度)이다.